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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송기숙의 ‘암태도’(문학으로 만나는 역사:5)
한겨레/1996.02.07

 

장흥타임스 기자 webmaster@jhtimes.net

 

일제 덮친 암태도 소작쟁의 거대한 해일
1920년대 전국 휩쓴 반봉건·반일투쟁 생생…민중애환 서린 너른들 그날 함성 들리는듯

“바다는 따가운 가을 햇살을 재재발기며 팽팽하게 힘이 꼬이고 있었다. 하늘도 째지게 여물어 탕탕 마른 장구 소리가 날 듯했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위로는 뭉게구름이 한 무더기 탐스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포 서쪽 다도해상에 있는 암태도 앞바다는 송기숙(61)씨의 소설에서 묘사된 바와 여일했다. 비록 소설이 쓰여진 때로부터 16년여, 소설 속 상황으로부터는 7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지나갔지만 그곳의 햇살과 물살과 하늘과 구름을 크게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다만, 실장어잡이 무동력 바지선들만이 여일한 풍경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을 뿐.

겨울의 오전 7시30분. 목포항의 희붐한 여명을 뚫고 길을 나선 고속 훼리호는 1시간30분의 항해 끝에 암태도 남강 부두에 닻을 내린다. 부두에 대기하고 있던 암태운수 소속 지프형 택시에 타고 순식간에 집 대문 앞까지 당도한 동네 아주머니는 “아따, 빠르요, 잉. 폴쎄 와부렀소야”라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대여섯 시간씩 걸리기 일쑤였던 것에 비하면 과연 빨라진 것이다. 그토록 길고도 험한 뱃길을 수백명의 섬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오고 갔던 70여년 전 그때,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소작회 사무실 그대로 남아

1919년 3·1만세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조선민족에 대한 지배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었다. 문화정치의 표면적인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유화국면이 뚫어놓은 공간이 억눌린 겨레에게는 최소한의 숨쉴 구멍으로 기능한 것 또한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을 거치면서 성장한 민중들의 정치의식은 1920∼1930년대 한반도를 각종 농민운동과 노동자투쟁의 마당으로 만들어 놓았다. 암태도로 대표되는 20년대 소작쟁의 바람은 조선 민중과 일제 통치당국 사이의 그같은 힘관계를 배경으로 하고서 일어난 것이다.

암태도의 소작 농민들이 지주 문재철을 상대로 쟁의에 나선 것은 1923년 8월 추수를 앞두고서였다. 서태석 회장이 이끄는 소작회 회원들은 수확량의 7∼8할에 이르던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하며 쟁의에 돌입했다. 그로부터 장장 1년여에 걸치는 암태도 소작쟁의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20년대 중·후반에 가히 전성기를 구가한 소작쟁의의 물결 속에서도 암태도 소작쟁의가 유독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상 일본 관헌과 일제 당국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점과 함께 그 싸움의 양상이 전례없이 치열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한 배수진을 친 것과도 같은 소작인들의 요구에 대해 문 지주쪽은 관과 경찰의 힘을 믿고 마냥 뻗세게만 나왔다. 농민들과 그들의 진짜 적인 일제 당국 사이의 대결은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문 지주 부친 송덕비의 파괴를 둘러싸고 문씨 일족 청년들과 농민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고 이를 빌미 삼아 경찰이 소작회 간부들을 대거 구속하자 농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1924년 6월 1천여명의 암태도 농민들은 면민대회를 열어서 경찰서와 문재철의 집이 있는 목포로 나가 싸움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암태도 소작쟁의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원정투쟁이 시작된다. 두차례에 걸쳐 열흘 남짓, 남녀노소가 망라된 6백여 농민들이 목포 경찰서와 법원 마당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행한 농성은 당시 신문에 이렇게 그려졌다.

“대지를 요를 삼고 창공을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야 흙이 묻든지 말든지, 졸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밤이슬을 맞으며 마른 정강이와 햇볕에 그을은 두 뺨을 인정없는 모기에 물려가면서 그날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또다시 그 이틀 되는 초 9일을 당하게 되었다.”

지금 보아도 기특할 정도로 분명히 소작인들의 편에 섰던 〈동아일보〉 등 신문의 연속된 보도는 이 사건을 암태도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 차원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문 지주와 그를 비호하던 경찰 및 사법부의 입지를 크게 줄여 마침내 항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거기에는 아사동맹을 결성하고 혼연일체가 돼 싸움에 나섰던 암태도 농민들의 각오가 무엇보다 커다란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송기숙씨가 1979∼1980년 잡지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펴낸 소설 〈암태도〉는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대체로 충실히 좇고 있다. 그는 “사건 자체가 극적인 구성을 띠고 있으며, 반봉건적·반일적인 순수 민중운동이 암태도라는 작은 섬에서 불타올라 마침내 성과를 거둔 것이 무엇보다 통쾌했기 때문에 실제 사건에 별다른 첨삭을 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밝혔다.

○서태석씨 묘엔 추모비 건립

그러나 작가란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존재이어서인지, 〈암태도〉에는 서태석씨와 청년회장 박복영씨, 부인회장 고백화씨, 문재철 지주 등 실존인물들말고도 몇명의 허구적 인물이 등장한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소작농들인 춘보와 만석이다. 동학에 가담했다가 관의 눈을 피해 암태섬으로 흘러든 춘보는 1920년대 소작쟁의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작가의 역사인식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남사당패 소리꾼으로 따라다니다가 부자집 막내딸과 눈이 맞아 역시 암태섬으로 밤도망을 놓은 만석 역시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일제 당국의 화해 제스처를 받아들이려는 박복영을 향해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려면 이제 당신도 더 나서지 마시오. 당신은 배가 안 고파본 사람이라 소작인들 속을 몰라요”라며 대드는 장면은 서태석과 박복영 등 근대교육의 혜택을 받은 지식인의 손에 있었던 싸움의 지휘권이 민중 자신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암태섬에는 소작농들의 애환이 넘실거렸던 너른 들이 여전하고 문 지주 부친이 살았던 남강 부두의 집, 그리고 당시 소작회 사무실이 있던 집도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1943년 이웃 압해섬에서 숨을 거두었다가 지난 79년 암태도로 옮겨온 서태석씨의 묘 옆에는 ‘의사 서태석 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암태도/글 최재봉>



2004년 0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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