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송기숙.전남대교수
김대중 선생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다. 그렇지만 한때 민주화 대열의 말석에 섰던 사람으로서, 같은 지역사람으로서, 당선을 충심으로 축하하면서도 당선하자마자 합의한 전두환·노태우씨 등의 사면은 모처럼 진전한 역사를 다시 후퇴시킨 사건이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불가피한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투어 그런 약속을 하는 판에 한발 더 내치지 않았더라면 1.6%였던 41만표라는 머리카락만한 표차는 뒤집혔을지 모른다. 또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화해를 다짐한 일이 사실일 거라고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일을 얄팍한 정략이나 감상이라 가볍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권야욕으로 국민 ‘도륙’
그러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통령 후보들의 사면 약속 경쟁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씨나락도 대들보도 아끼지 않는 우리 정치의 자화상이었다. 지금은 재판과정을 통해서도 대충 알려졌지만 전·노씨 일파는 오로지 정권 야욕으로 국민을 글자 그대로 ‘도륙’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이야기라면 고개부터 내두르는 사람이 있지만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 광주 시내에서 나흘 동안 학살을 하다가 무등산으로 밀려난 군인들은 사흘 동안이나 쉰 다음, 그러니까 그때는 제 정신들이 날 법도 한데 시 외곽으로 이동하면서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생들을 오리사냥 하듯 쏴 죽이고, 구경하다 도망치는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짜리한테 M16 소총을 일곱발이나 명중시켜 몸뚱이를 벌집을 만들었으며, 논바닥의 칠면조 우리에 난사하여 400여 마리 가운데 절반을 죽이고, 집집마다 쓸고 다니며 개고 젖소고 쏘았다.
군인들의 인격을 이 지경으로 파괴한 장본인이 그들 일파이다. 군인들의 인격을 그렇게 파괴한 것은 광주 사람들의 육체를 파괴한 것보다 어느 의미에서는 더 잔인한 짓일 수도 있다. 그때 그런 일을 저질렀던 군인들도 자신들의 행위를 되돌아보며 치를 떨 것이며, 그런 점에서 광주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도 광주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로 이해하고 동정하는 이들이 있다.
이번 사면의 명분으로 국민의 화해와 화합을 내세우고 있지만 당치않은 말이다. 지금의 불화상태가 그들 일파의 사법처리에 커다란 원인이 있는 것처럼 둘러댄 것도 문제지만, 설사 그런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전·노씨 일파가 광주항쟁을 고정간첩의 소행이니 뭐니 철저하게 왜곡 선전하여 그런 말이 머리에 박혀 있는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진상을 알려 이해시키는 것이 정치가가 할 일이지 그런 짓까지 한 사람들을 사면이라는 미명 아래 풀어준 것은 본말을 뒤바꾼 일이다.
○뉘우침없이 발뺌 급급
사면은 용서의 법률적 개념이며 용서란 잘못을 뉘우쳤을 때 뉘우침을 받아주는 일이다. 아무리 뉘우쳐도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들 일파는 재판 과정에서도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온갖 요설로 책임을 떠넘기며 자기 발뺌에만 급급했다. 발포 명령자를 가려내지 못한 사실 한가지만 보더라도 짐작하고 남는다. 이런 사람들을 내준 것은 국가제도인 사면이라는 허울을 씌운 ‘방면’일 뿐이다. “유럽인들의 생존의 기초야말로 ‘폭력의 변증법’ 위에 있다.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교활한 위선으로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자기 이익을 침해하는 자에게 총이든 뭐든 폭력으로 맞서다가 이러지 말고 너도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약속으로 갈등이 조정되는 상태를 꼬집는 말이다.
○제2의 전·노 나올수도
법이라는 공권력도 그 실체는 폭력이다. 공권력은 부당한 폭력은 물론이고 억울한 일에 대한 정당한 폭력, 곧 보복까지도 금하고 있다. 공권력이 보복을 금하는 것은 공권력이 대신해서 공정하게 보복(응징)을 해주겠다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이 약속은 절대적이며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개인이나 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보복을 할 수밖에 없다. 김구 선생 살해범 안두희씨에 대한 끊임없는 테러나 그 마지막 테러를 하고 지금 감옥에 있는 박기서씨의 경우가 그것이다.
전·노 일파의 그 무자비한 폭력을 국민의 개인적 폭력에 대신한 공권력이 제대로 응징하지 못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그런 자들에게는 이런 벌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또 다시 말하면 우리 국민은 이렇게 만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제2의 전·노 일파 같은 폭력이 다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 그럴 경우 계속해서 국민의 저항과 희생을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사면에 불만을 품은 제2의 박기서씨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광주 일부에서 사면에 동의한 사람들이 있다지만 그것은 지금의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쓰린 가슴을 누른 처사들일 것이며, 피해자들이 동의하든 말든 정치가 또 한번 소중한 역사의 교훈을 깨뜨렸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할 일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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