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와 지역문학 연구
-김정한·송기숙을 중심으로
송 명 희
1.머리말
김정한(金廷漢,1908∼1996)과 송기숙(宋基淑, 1935∼ )은 여러 모로 공통분모를 많이 가진 작가이다. 염무웅은 송기숙에 대해서 "그는 지난 시대 작가로서는 오직 요산 김정한 선생만을 문학적 선배로 두고 있다 할만한 강인한 민중적 인간상의 창조자다. 또한, 그는 요산 선생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우리 민중언어의 가장 풍성하고도 자유자재한 탐구자이다"라고 했다.
김정한과 송기숙은 평생 지역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면서 지역성을 개성으로 드러내는 소설창작을 통해서 한국문학의 중심부에 진입한 작가이다. 우리 문학을 중심(서울)과 주변(지방)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이분법이 현실을 지배한다고 할 때 이들은 소위 주변부에 속하는 지방작가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식민지인이라는 용어를 "억압받고 종속되어 있는 하층민, 소수인종들, 그리고 심지어는 주변으로 밀려난 학문의 세부분야까지도" 그 의미가 확대될 수 있다고 했는데, 지역의 문학은 현실적으로 한 나라의 중심문학의 변경에 위치하는 주변문학으로, 지역문단 역시 주변의 문단으로 위치할 수밖에 없다.
본고는 영남과 호남의 대표적 작가이자 농민문학, 민중문학, 민족문학이라는 차원에서 한국소설사에서 독보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김정한과 송기숙의 작품을 90년대 이후 문학연구의 새로운 방법으로 떠오른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비평론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김정한과 송기숙은 탈식민주의가 관심 갖는 정치적.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매우 높은(높았던) 작가들이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그려냈던 주변부인 지방, 소외계층인 민중, 반외세의 민족의식은 바로 탈식민주의의 관심사이다. 탈식민주의 서사는 중심부의 서사가 아니라 주변부의 서사로서 주변부의 침묵과 억압과 소외에 관심을 가지며, 중심부의 지배언술에 저항하는 반언술이다. 지금까지 이들의 문학에 대해 탈식민주의 비평론에 입각한 접근은 없었지만 탈식민주의 비평론은 이들의 문학을 해석하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정한과 송기숙의 여러 작품들이 탈식민주의 비평론에 의해서 분석 가능하지만 본고에서는 김정한의 <지옥변>과 송기숙의 《은내골 기행》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지옥변〉(1970)은 단편이고, 《은내골 기행》(1996)은 장편이라는 문제점이 있지만 김정한의 경우는 단편 위주로 작품활동을 했으며, 송기숙은 단편도 있지만 장편 위주의 작품활동을 한 만큼 장단편의 불균형한 텍스트 선정은 불가피하다.
2. 왜 탈식민주의인가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는 식민주의의 영향을 바로 분석함으로써 탈식민화를 도모하는 문화비평론이다. 사이드, 스피박, 바바, 애쉬크로프트, 타핀, 무어-길버트, 패리, 아마드, 모헨티, 파농 등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구성된 탈식민주의는 단순한 문학이론이 아니고 인종문제, 계급문제, 지역감정문제, 성별문제, 빈부문제, 파벌문제 등 모든 권력투쟁과 차별의 문제까지도 통찰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문화비평론이다. 탈식민주의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식민지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제3세계의 민족, 유색인종이나 소수인종을 중심으로 인종억압이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통해 과거 피식민지의 역사나 문학을 재조명해 보는 이론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문화적 정신적 무의식적 예속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식민주의 비평방식이 요청된다. 탈식민주의는 식민지 시대로부터 독립 이후까지를 포괄하는 통칭적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비단 식민지시대 뿐만 아니라 독립을 한 후에도 계속 남아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식민지의 잔재를 탐색해서, 그것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것들에 대항하자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탈식민주의는 식민지 시대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그 이후의 정신적 식민주의 시대의 불가시적 억압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빌 애쉬크로프트(Bill Ashcroft)는 "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용어는 식민주의 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모든 문화를 포괄하는 통칭적 개념으로 사용된다"고 정의했다. 결국 탈식민주의는 형식적인 독립과 해방의 이면에서 우리의 의식구조를 더욱 근원적으로 틀 지워온 가시적 또는 불가시적 식민담론을 비판하고 그것들의 정체를 밝혀냄으로써 그것들에 저항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번 형성된 식민담론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영토에 대한 침입처럼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지배보다 더욱 무섭고 교묘한 문화적 지배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3. 김정한과 탈식민주의 글쓰기
1)해방과 탈식민화의 실패
<지옥변>(1970)은 해방후의 지옥과도 같은 혼란스러운 정국과 사회상을 그린, 특히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음으로써 친일세력이 계속 득세하고, 일제하에서 징용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소외계층이 독립후에도 다시 최하층의 소외계층으로 전락하며, 부패한 정치로 인해 한밤중에 수재까지 당하는 변고를 고발한 작품이다.
징용에 강제 동원되었던 허경출은 전쟁말기에 패잔병들과 함께 뉴기니아섬 우웬스탄리란 험한 산맥 속에 도망쳤다가 뒤늦게 연합군에 붙들려 1년 동안 전범자로서 고역을 치르다가 전쟁이 끝난 지 3년만에 귀국한다. 하지만 그는 4년이 넘는 징용기간 동안에 강제당한 예금을 한 푼도 찾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나와 부두(부산으로 추정)에서 하역노동자로 일하다가 귀국한 지 이태만에 병사한다.
고아로 남겨진 16세의 차돌이가 신문사를 찾아가 아버지의 통장 및 채권증서를 내밀며 찾을 방도를 묻는 것으로 작품은 발단된다. 하지만 신문사 사회부장은 이를 찾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야만 된다"고 말하고, 이에 차돌이는 "당연히 받을 거 받는데 무슨 협상이란 기 필요합니꺼?"라고 내뱉고 신문사를 나오고 만다.
차돌이가 고아신세가 된 데에는 아버지를 징용으로 강제 동원했던 일제라는 식민권력과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해방후의 무능한 정부에 책임이 있다. 일제의 피해자인 허경출이 종전 후에 일본군인과 같이 전범으로 취급되었다니, 해방직후 미군정하에서 한국인의 인권은 전혀 보호받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차돌이 어머니가 개가를 해버린 것도 아버지가 전쟁이 끝나고도 2년이 지나도록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역시 징용에 끌려갔던 한국인에 대한 귀국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데서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지 3년만에 귀국한 허경출은 이태만에 늑막염으로 사망하고 마는데, 이는 국가가 징용으로 끌려갔던 국민들에 대한 보상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차돌 아버지는 징용에서 강제당한 예금을 찾지 못함으로써 징용으로 상한 몸을 돌볼 사이도 없이 부두의 하역노동자로 힘겹게 일하다가 건강을 해쳐 사망에 이르고 만 것이다.
작품은 대일청구권문제를 둘러싼 해방직후의 정황을 반영하며,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 기본조약>이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민이 당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어업문제, 청구권문제, 문화재 반환문제 등에 관해 한국 측의 지나친 양보로 타결된 데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해방후 대한민국정부는 국민을 국가의 귀속물로 환원시키면서도 정작 징용이나 정신대로 희생되었던 국민들의 피해보상을 무시한 채 개인적 보상청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이들이 보상청구를 할 기회마저 봉쇄해버린다. 이처럼 국민의 권리나 이해가 국가에 의해서 대변되지 못하는 현실로 인해 아버지와 같이 징용에 나갔던 울산 아저씨 등은 <민간대일청구권협회>를 조직하여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보상을 청구해보지만 오히려 이 일은 정치활동으로 간주되어 경찰에 끌려가 고생만 하고 나온다.
이러한 상황은 과연 해방이 누구를 위한 해방이며, 정부가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즉 정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주권을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나 주권을 되찾은 해방이후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전후책임이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관해 철저히 사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추궁하며, 그에 따라 피해자와 피해국에 사죄와 보상을 실시하는 일이다. 그런데 당시 친일적 친미파 정치인들은 보상문제를 선거에 이용할 뿐 "먼젓번 선거 때만 해도 일만 끝나면 우리들이 가진 일제 때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곧 내줄끼라고 공약인가 나발인가까지 해 놓고서" 선거가 끝나면 깨끗이 외면해버린다. 즉 정치인들은 그저 그들의 정치적 야욕에 국민을 이용할 따름이다. 따라서 한 국가내에서도 정치인과 같은 지배계층과 징용을 나갔던 소외계층은 국민의 이름으로 동일시될 수 없다. 더욱이 그 지배계층이 바로 일제하에서 친일파로 민족을 괴롭히던 세력들이고 보면 아무리 나이 어린 차돌이일지라도 '경악과 실망과 분노'를 아니 느낄 수 없다.
지배-피지배의 권력구조는 일제하에서는 식민종주국인 일본인/친일파 한국인/지배받는 피식민지인 순서로 위계화되었지만, 해방으로 일제가 철수한 상황에서도 다시 친일파가 새로운 권력층으로 부상함으로써 일제하에서 핍박을 받았던 피식민 국민들이 다시 피지배계급으로 전락하고 마는 모순된 역사를 재현한다. 울산아저씨가 차돌과의 대화에서 "그렇기 말이다. 암매(아마도) 해방이 꺼꿀로 대 가는 모양이지…!"라고 말한 것이라든가 "그기 이 나라 백성된 덕분 아이가!"라고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은 모두 해방후의 전도된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해방이 된 후에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차돌이나 울산아저씨와 같은 최하층의 국민들은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혼란스러운 사회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집권여당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야당, 학생 등의 반대세력을 불순공산세력으로 몰아 부친다. 즉 반공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며 이들에게 '떠들어 봤자 소용이 없었다'는 패배감만을 안겨줄 뿐이다. 차돌이는 어린 시절 일본말을 쓰지 않는다고 학생들을 괴롭히던 친일파 교장이 상업학교 교장이 된 사실에 충격을 받고 고향에서 친일파의 세 축이 되었던 인물- '산바 가리스'에 대해서 고향친구에게 편지로 묻게 되는데, 그로부터 온 답장은 놀랍게도 그들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제하에서 차돌이 아버지는 일제 순사였던 불칼이에 의해 징용에 끌려갔으며, 친일파 교장은 일본어를 쓰지 않는다고 학생들을 괴롭혀 왔다. 차돌이는 학교에서 유기공출로 괴롭히자 학교를 그만두어 버리는데, 일본말만 쓰던 교장은 해방이 되자 갑자기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말로 유사이래 기쁜 날이라고 연설을 늘어놓는다. 그런 그가 상업학교 교장으로 건재하는가 하면, 불칼이는 "사람 잘 잡아내는 <기술자>라고 하여 빈민특위에서 하룻밤만에 풀려나 xx청년단 지부장이 돼 가지고 국회의원이 나갈 것이라고 설치고, 하세가와는 xx당 군지부장이 돼 가지고 읍내와 서울을 왔다갔다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그들은 친일을 다음과 같이 합리화한다.
그 사람들이 지금 뭐라고 허고 다니는지 아냐? 제국 때 즈그들이 그런 것은 일본에 붙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공산당 막기 위해서 그랬다는구마. 용하지? 히틀러가 지금 여기 없어 다행이지, 있으믄 또 <산바 가라스> 헌다고 야단들일 걸세……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 친일이 묵인됨으로써 친일파 산바 가라스, 즉 교육계, 경찰계, 정치계가 해방정국의 신권력층으로 부상하게 된다. 해방후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에 대한 인적 청산을 포기한 채 오히려 친일파의 관료· 경찰· 정치 조직 등에 기대어 정치기반을 구축함으로써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울 기회를 잃어버린다. 산바 가라스의 소식을 접한 차돌이는 한없이 경악과 실망과 분노와 불신의 착잡한 감정에 휘말리게 되는데, 차돌이가 느낀 경악과 실망과 분노는 바로 작가 김정한의 해방정국에 대한 경악과 실망과 분노일 터이며, 이 작품을 쓰게 만든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울산 아저씨의 "해방이 꺼꿀로 대 가는 모양이지"라는 탄식은 바로 해방정국에 대한 작가의 불신과 탄식일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하면 탈중심의식(decentered consciousness)이란 어떤 사회의 중심 지배 집단에서 배제된 집단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 배제 상태에 비판적인 의식이며, 또한 총체화하고 체계화하려는 지배집단의 기도에 저항하는 의식이다. 김정한은 이처럼 차돌이나 울산 아저씨와 같은 중심에서 배제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해방이 되고도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상황을 비판하며, 강력한 탈중심의식을 표출한다.
결국 일제 식민주의의 예속의 고리를 끊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며, 일제하에서 징용으로 끌려갔던 최하층의 빈민은 해방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다시 사회적 소외층으로 전락하는 모순 속에 노출되고 만다.
돈과 권력만 가지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그의 조국이 새삼 한스러웠다. 생떼 같은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쓴 채 목이 달아나가 예사고, 정작 죽어야 할 놈이 금방 훨훨 털고 살아나고…… 모든 것이 식은 죽 먹기 같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했다.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획득하는 혼란스런 사회상이 드러나는 한편 돈과 권력을 앞세워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관료의 부패상도 폭로된다. 시장은 저수지 아래쪽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저수지를 매립하여 그곳을 고급주택지로 매각함으로써 한밤중에 발생한 홍수로 저수지 아랫마을이 침수되는 수재가 발생한다. 홍수는 부모를 잃고 마음 붙일 곳 없던 차돌이의 하찮은 꿈이었던 벌통까지 떠내려보내고 만다. 벌도 없고, 집도 없고, 부모도 없는 천애의 고아 소년으로 하여금 '숫제 고아의 행복이란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한 모든 아이러니가 바로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데서 발생한 것이다.
차돌이는 벌 같은 건 벌써 생각지 않았다. 그야 치려면 언제든지 칠 수 있는 일이었다. 집도 없다. 그러나 집은 처음부터 없는 집이다. 구두닦기통만 있으면 어째도 살 수는 있다. 그는 숫제 고아의 행복이란 것을 처음으로 느끼기도 했다.
당국에서는 깨끗지 못했던 선거의 뒤치다꺼리로 혼이 나던 판이라 이재민들에 대한 구호의 손도 얼른 뻗치지 못했다.
집을 잃고 언덕길에 모여 선 사람들은 노기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멀쩡한 못을 메워 땅 팔아먹을 줄만 알았지 물처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등한했던 당국에 대한 불평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작가는 "그러나 이 이재민의 대열이 미처 목적지에 당도하기 전에, 시장의 집에선 맹렬한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에서 보듯 저수지 매립을 허가해준 부패한 관료인 시장 집에서 불꽃이 치솟고 분노한 이재민 시위대가 몰려가는 결말을 통해서 일제 잔재를 청산을 하지 않은 친일정권과 민중을 외면한 부패한 관료를 응징하고자 한다. 이 작품의 결말은 마치 <사하촌>에서 마을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절로 몰려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일제 식민치하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된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집중적으로 고발하며 탈식민화(decolonization)의 필요성을 강하게 촉구했다.
2)신식민주의의 징후들
<지옥변>은 해방 후 친일파의 득세와 일제잔재 미청산에서 야기되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모순을 그리는 데 집중되어 있지만 해방과 동시에 미군정시대가 개막됨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를 행사하게 된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도 일정부분 표현하고 있다.
우선 작품의 주인공인 차돌이의 직업이 구두닦이- '유식한 말로 <슈사인 보이>'로 설정된 것이 그것이다. 또한 작품에는 아이스크림이 등장하는가 하면 차돌이와 수남이 등 청소년들은 빵집을 만남의 장소로 자주 이용한다. 즉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의 풍속이 서양식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미국문화가 침투한 여러 징후를 드러낸다. 차돌이는 일요일이 되어 가야공원으로 일을 나가는데, 여기서 "<부기 부기 기타 부기!>로, 맘보를 흔들어대는 중년부인 떼도 있었다. 더 젊은 <헤이 몽키> 패들은 대개 으슥한 곳에서 놀아났다"에서 보듯이 우리의 놀이문화 속에 이미 서양 춤인 맘보와 트위스트가 깊숙이 스며든 것을 그려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차돌이가 하숙하고 있는 주인집 딸 수남이는 "얼마 전부터 어느 고물전에서라도 사 신은 듯한 흰 하이힐까지 해 신고서, 제법 <미니> 바람에 엉덩이를 근사하게 껍적거려댔다."에서 보듯 하이힐과 미니 스커트까지 차려 입음으로써 미국문화의 모방의 흔적을 차림새에서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대체로 문화적 종속은 전통풍속의 파괴와 새로운 문화의 모방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문화적 차원의 식민화는 무의식의 층위에서 불가시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데 더 큰 심각성이 있다. 그것은 모방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또한 식민지 지배자는 피지배자에게 지배권력의 외부형식을 받아들이고 지배권력의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방은 피지배자의 문화가 지배자의 문화를 변형시키고 문명화시키는 '서사시적' 기획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바바에 따르면 모방은 폭력에 기초한 지배정책과는 달리 정서적,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식민권력과 지식의 가장 교묘하고 효과적인 전략 가운데 하나이다.
수남이가 짜배기 등과 어울려 놀면서 외박을 하는 등 문란한 생활을 하는 것, 또는 수남이와 그의 친구들이 차돌이 방에 같이 자면서 돌아가면서 차돌이와 성관계를 갖는 것 등 청소년들의 성적 타락상을 통해 남녀칠세부동석의 전통적 성풍속이 급격하게 파괴되며, 저급한 미국문화가 깊숙이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니나 다를까, 수남이가 빠져 나가자 순득이란 애가 곧 자리바꿈을 했다. 이건 다짜고짜로……했다. 영락없는 동물이었다.
차돌이는 완전히 놀림감같이 되어 버렸다. 지쳤다. 그녀들이 공동변소가 아니라, 자기자신이 바로 그런 꼴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바깥에서는 차돌이의 그러한 악몽을 짓누르듯 주루룩주루룩 비가 더욱 극성스럽게 쏟아졌다.
그런데 능욕당하는 것은 차돌이의 몸과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해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과 예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다. 해방이후에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것도 결국은 미군정이 일제 잔재의 물적, 인적 구조를 청산하지 않고 재도입하여 강화한 데서 비롯되었고, 또한 친미파 이승만이 정권을 승계한 데서 강화되었다. 이후 일본 식민주의와 미국에 의해 형성된 신식민주의는 한국인의 삶에 불가시적으로 영향력을 미쳐왔으며, 해방직후를 배경으로 한 <지옥변>에서 이미 그 징후는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4.송기숙과 탈식민주의 글쓰기
1)탈식민화와 기억하기
《은내골 기행》(1996)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조작한 민청학련사건, 언론탄압, 새마을운동의 허구성을 은내골의 6·25의 분단비극, 그리고 친일세력과 연관지은 작품이다. 주인공 '김명호'는 해직기자이다. 그는 유수한 신문사 기자로서 최근 '해방 30년'이라는 기획기사를 취재하여 쓰다가 '왜정시대부터 악덕형사로 횡포가 심했던 경찰간부가 여기서도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하는 대목이 화근이 되어 "이 자식아 일본경찰 출신 악덕 형사들이 어쩌고 어째? 왜정시대부터 빨갱이들하고 목숨걸고 싸운 사람들이 누군 줄 알아?"라고 '악덕'을 물고 늘어지며, 조직적인 전화공세에다 권력층까지 동원한 압력 때문에 결국 사표를 내고 서너 달째 쉬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그의 해직은 해방 30년이 되도록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적으로 계속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친일세력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74년으로, 때는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시킨 긴급조치 제1, 2호에 이어 일체의 집단행동을 금지시키는 긴급조치 제4호가 발동된 박정희 유신 독재체제하이다. 이러한 시간적 배경은 "7월초의 음울한 장마 속에서 시작된 군사재판은 입에 피를 물고 내발기는 맹수의 서슬이었다"라고 서술된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했다는 혐의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중심으로 180명을 구속·기소한다. 소위 민청학련사건이다. 바로 이러한 유신독재체제하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이자 초점화자인 김명호는 해직되었으며, 그의 주변은 가장 절친한 친구의 처남이 민청학련사건의 주도급 인사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있는 암울한 상황이다. 안팎으로 우울하기 그지없는 상황하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비상군법회의가 진행중인 재판정 근처 다방을 어슬렁거리다가 술통에 빠져 지내는 일이 고작이다. 그러던 차에 월간지의 화보에 실린 '은내골의 선돌' 사진은 그로 하여금 당장 은내골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명호는 당장 은내골로 달려가고 싶었다. 우선 그 동네 뒤 진국사에 가서 그 안온한 정적 속에 몇 달 동안 푹 파묻히고 싶은 유혹이 몰려들었다. 무더기무더기 뭉게구름이 한가한 푸른 하늘과, 그 하늘 밑에 풍성한 녹음과, 소나기 퍼붓듯 온 산에 가득한 매미 소리와, 대웅전 뒤안 이가 시린 샘물과, 아침저녁 예불소리와, 그리고 그 동네 분위기는 또 얼마나 푸근하던가.
말하자면 은내골은 서울에서의 긴급조치가 발동된 공포정치의 상황과 개인적으로는 해직까지 당한 상태의 우울증을 벗어날 수 있는 도피의 장소로, 또한 절친한 친구 처남을 위해 탄원서를 써야하는 내키지 않는 상황으로부터도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로 선택된다.
하지만 은내골이 정말 인용문처럼 당장 달려가고 싶은 안온한 장소이며, 우울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휴식의 공간인 것일까? 그곳은 오히려 주인공을 억압하고 그의 기억을 옥죄어온 고통스런 과거의 장소는 아니던가?
그가 은내골을 처음 찾아갔던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국민학교 6학년 때이다. 집으로 피난온 사촌형님이 피난처를 옮기게 되어 따라가 본 은내골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푹 놓이며, 전쟁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느껴지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과 사촌형님의 이모댁에서 만난 한 살 아래의 '혜선'이란 소녀에게서 느낀 첫사랑의 감정은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를 끌어당길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작품의 제2장은 은내골의 평화롭고 안온한 자연을 묘사하며, 혜선이란 소녀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던 아름다운 추억, 파랑새에 대한 추억, 진국사 구경을 하며 놀던 추억들을 통해 은내골이 신화적인 묵시적 공간임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 묵시적 공간은 악마적인 6·25전쟁으로 인해 처절한 비극의 공간으로 바뀌고 만다. 즉 은내골은 좌우의 실력자가 일가 친척관계에 있어 어느 세상이 되어도 안심이 되겠다던 예상과는 달리 인민재판을 받고 죽은 사람들-일제시대 일본 고등계형사로 악명이 높은-의 가족이 몰려가 '전부 죽이고 전부 불을 질러'버린 참혹한 재난의 현장으로 바뀌고 만다. 물론 이 비극의 현장에서 첫사랑의 소녀 혜선이도 죽고 만다. 말하자면 '은내골'은 명암이 극도로 교차하는 비극적 공간이다. 은내골의 자연은 지극히 평화롭지만 6·25전쟁의 폭풍은 은내골을 끔찍한 살육의 장소로 파괴하고 변질시킨다. 그리고 그 파괴와 살육은 바로 일본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은 자들의 가족, 즉 친일세력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그런데 그 비극의 공간으로 되돌아가 보는 일이 단순히 안온한 휴식의 의미를 가진다고 정말 김명호 자신은 믿는 것일까? 그는 정말 마을 전체가 불타버리고 첫사랑을 느꼈던 소녀가 처참하게 죽은 비극적 사실에 대해 기억상실에 빠졌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 끔직한 비극적 기억을 망각할 수 있으며, 은내골을 평화롭고 안온한 장소로서만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주인공의 '은내골 기행'의 충동이야말로 호미 바바(H. Bhabha)가 기억하기는 결코 자기반성이나 회고와 같은 정태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외상을 이해하기 위해 조각난 과거를 짜 맞추어 보는 것, 고통스러운 다시 떠올림이다라고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실로 탈식민화는 망각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릴라 간디(Leela Gandhi)의 말처럼 "단순히 식민기억들을 억압하는 것만으로 식민경험이라는 불편한 현실에서 해방되거나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망각 혹은 과거의 기억을 억압하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그 차단되고 금지된 기억들로부터의 복수를 초래한다. 그 기억들은 위험스러운 방식으로 그 기억을 억압한 자들의 무의식에 침투해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거의 설명 불가능한 증후들을 낳는가 하면, 정신착란의 환영적 이미지로 그들에게 출몰하곤 한다. 과거의 실체를 거부하고 그것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치욕스러운 과거에 겁에 질려 그것을 추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유일한 출구는 고통스럽더라도 식민 과거를 다시 방문하여 기억하고, 특히 따져 물음으로써, 즉 우리의 과거에 관해 엄정하게 사유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명호의 은내골 기행은 말하자면 억압된 과거-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폭력적이고 불행했던-를 다시 방문하여 망각에 반항하고 저항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스런 과거를 따져 물음으로써 아직도 도처에 남아 있는 종속의 흔적과 기억들, 식민주의가 남긴 상처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심리적 의미기능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고통으로부터 야기된 현재의 모순과 고통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김명호가 사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언론탄압과 유신독재체제를 단절하기 위해서는 6·25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억압된 기억을 불러내야 한다고 작가는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무의식은 은내골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 망각하려는 의지를 갖고 기억상실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기억 상실과 침묵은 오히려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연장시키는 일이기에 그는 억압된 기억을 복원하고, 고통스러운 과거와 직면하여 그것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은내골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은내골'은 20년 전의 과거인 6·25전쟁의 상처만을 안고 있는 곳이 아니라 70년대의 유신의 극심한 탄압이 자행된 박정희 독재정권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임이 드러난다. 작품은 김명호의 기행을 통해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도 6·25전쟁의 비극과 일제잔재의 모순은 청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기저기 비극의 흔적을 남기며 여전히 은내골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음을 폭로한다. 6·25전쟁의 불행한 과거와 분단의 모순, 그리고 현재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고 언론을 탄압하며 정권을 연장하는 유신독재체제는 상호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작가는 파악하며, 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그리고자 한 탈식민주의 담론의 핵심이다. 김명호는 은내골 기행에서 기억은 그가 망각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게 되는데, 진국사에서 만난 선경이야말로 그 출생에서부터 비극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과거 6·25전쟁의 비극을 체현했던 인물이 첫사랑의 소녀 혜선이라면, 화가인 선경이란 젊은 여성은 6·25전쟁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모순을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김명호와 선경은 간첩사건으로 연루되어 비밀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유신독재정권의 획책해온 공작정치와 그 부도덕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유신독재정권은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을 청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모방하여 국민을 탄압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를 승계하여 독재정권을 연장하였다. 유신독재정권의 폭압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기억하기'는 현재의 고통을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연관지어 보게 하는 역사적 통찰력을 갖게 해주지만 모순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단순히 '기억하기'란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거대한 독재정권의 구조를 지식인 기자의 역사적 통찰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시대가 가졌던 총체적 절망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기억하기'라는 반항조차 하지 않는다면 폭압적인 유신독재체제의 모순을 해소할 출구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항변한다.
2)반공 이데올로기와 전도된 내셔널리즘
작가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뿌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배태된 것임을 재차 환기시킨다. 즉 작품의 제1장에서 주인공이 신문사를 사직하게 된 동기가 바로 '일본경찰 출신 악덕 형사들'이란 표현 때문으로 설정했고, 유신군사독재정권의 최고통치자인 박정희는 식민종주국인 일본군관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지금 절 땅을 사들여 치부를 하려는 차출만이란 자 역시 일본형사의 정보원 출신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친일세력은 반공을 표방하는 독재정권에 의해서 비호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차출만은 6·25 당시 읍내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사람들이 '진짜배기는 놓쳤구먼'이라고 애석해 하던 인물로서 북한에서 고등계형사의 정보원을 하다가 내려와 자기가 무슨 반공투사라도 된 듯이 설쳐댄다. 그는 입산한 사람(빨치산)의 아내 가운데 얼굴이 반반한 여자들을 골라 강간한 파렴치한으로서 은내골 주민 모두가 혐오하는 인물이다. 차출만의 악행은 식민지 시대 이후에도 식민주의적 잔재를 청산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된 것으로 작가는 제시한다. 즉 차출만이 '입산한 사람의 아내'를 강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승만 이후 남한정권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공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즉 반공정권은 공산주의를 주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입산한 사람의 아내도 적으로 간주되어 강간이라는 범법사실마저 묵인된다. 이는 마치 전쟁시에 점령지 사람들은 성별에 관계없이 '적'이기 때문에 남성은 살상 대상, 여성은 강간 대상이 되었던 것과 동일한 구조이다. 반공정권에 빌붙어 지내온 차출만은 그의 고향에서부터의 악행을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명호의 은사격인 교사 장인철을 빨갱이로 몰아 투옥시켰으며, 선경이의 어머니를 강간하여 임신시켰고, 지우스님을 협박하여 절 땅을 가로채려고 하는 등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반공독재정권은 이를 용납한다.
김명호는 일제하의 경찰은 철두철미 일본의 하수인으로서 그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체포행위는 반공의 범주에 드는 것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그는 6·25가 친일파 문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후 우리 정치에서 민족문제는 아예 증발을 해버렸고,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민족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불행한 현대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명호와의 대화에서 선경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짐작하고 다시 정신병이 재발한다. 차출만의 음모를 짐작한 김명호는 결국 그가 염려하고 불안해하던 대로 한물댁과 그의 남편을 연관지은 간첩사건혐의로 비밀리에 끌려가 고문에 못 이겨 모든 것을 허위자백한다.
김명호와 선경이 비밀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며, 간첩죄를 허위자백 하는 상황은 일제가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운동가를 잡아다가 고문하며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과 너무도 동일하지 않은가. 즉 일제시대 이후 그대로 답습된 고문의 행태를 보여주며, 군사독재정권이 어떻게 간첩사건을 조작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해방 이후 일제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음으로써 해방 30년이 지나도록 "친일파들이 정권을 농단하고 있는 우리 현실의 비참한 단면"과 부패한 유신독재정권의 공작정치의 실상을 명호의 은내골 기행과 비밀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 등을 통해 명명백백히 폭로한다. 즉 후기 식민주의 시기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식민주의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력을 문제삼고 있다. 앞서 김정한의 작품에서도 논의되었지만 해방이후 남한에 미군정이 실시됨으로써 일제잔재는 청산되지 못하였으며, 미·소의 분할 통치는 남북한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또한 6·25전쟁은 분단고착화와 함께 냉전체제를 강화시켰으며, 반공이데올로기를 공고하게 뿌리내리게 했다. 특히 남한은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경제적 종속, 단순한 '지배-종속관계'가 아니라 원조를 통한 '후원-수혜 관계'를 통해 미국 주도의 세계자본주의에 종속적으로 편입되었다. 즉 박정희의 유신독재체제는 일제 식민통치가 남긴 식민주의적 억압적 정치체제의 유산에다 미국에 종속된 신식민주의적 정치체제의 결합체이다.
주인공 김명호는 '해방 30년'이란 기사작성과 은내골 기행을 통해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의 정체를 밝혀냄으로써 그것들에 대항하고자 한다. 이것이 은내골 기행, 즉 은내골 기억하기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삼엄한 공작정치하에서 일개 지식인인 기자의 저항은 해직으로 보복을 당하거나 또는 간첩사건이란 반공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음모에 연루되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력감에 휩싸일 뿐이다. 그는 기억하기를 통해서 과거를 뛰어넘지도, 과거의 고통을 치유하지도 못한 채 현재 반공이데올로기로 국민을 탄압하는 유신독재의 뿌리가 일제 식민주의의 고리를 끊지 못함으로써 야기되었다는 사실만을 철저히 깨닫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결국 해방 이후 독재자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며 친일파를 비호해왔고, 단지 집권 연장을 위해 전도된 내셔널리즘을 추구했다. 그리고 《은내골 기행》은 바로 이를 비판하고 있다.
게다가 김명호와 동일한 간첩사건으로 끌려갔던 선경은 정신병이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더 심각해진다. 헛소리를 하며 공포에 떨고 있는 선경의 모습을 통하여 식민주의의 잔재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면서 삶의 건전성을 해치고 있음을 암시한다.
유신정권의 폭압 속에서 작가는 차출만을 진돗개에 물려 죽게 만드는 설정을 통해서 악을 바로잡고 징계하고자 한다. 작가는 친일적인 반공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국민에 대한 억압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차출만과 같은 친일파는 반드시 징계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나타냈다. 하지만 차출만에 대한 응징은 심리적 카타르시스는 줄 수 있을지언정 근원적 구조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차출만을 징계한 작가의 신념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를 진돗개에 물려죽게 만드는 상황설정, 토종개인 진돗개와 외래종인 셰퍼드의 싸움과 같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에피소드는 통쾌함을 유발시키기보다는 작품의 진지함을 손상시키는 에피소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탈식민의 대안공간· 치유적 여성성·근대화의 허구성
(1)탈식민의 대안공간과 치유적 여성성
은내골은 평화로운 묵시적 공간→6·25전쟁의 비극적 공간→후기 식민주의적 모순을 드러내는 공간→탈식민적 대안공간으로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다. 작가는 은내골을 통해서 주민 주체적 민중공동체의 실현을 꿈꾸고 있다. 특히 그 가능성은 들몰댁과 한몰댁의 화해로운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이들은 6·25의 구체적 피해자들이다. 들몰댁은 빨치산 토벌을 하다가 죽은 경찰간부의 부인이며, 한몰댁은 월북한 인민위원장의 부인으로, 이들은 이념적으로 치자면 서로 적대적 관계이다. 하지만 들몰댁은 폐인이 된 한몰댁을 찾아내어 정성스레 돌보았고, 둘은 동네의 어른 노릇을 하며 그야말로 자매애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김명호는 "그럼 그 부인들 사이에서는 남북통일이 된 셈이네요."라고 말한다. 더욱이 한몰댁은 비밀리에 남하했던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비밀로부터 한몰댁 모자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지우스님은 자신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으로 위장한다. 따라서 진국사의 지우 스님은 미륵부처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이며, 그야말로 생명에 대한 외경과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확고히 보여주는 존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는 사냥개와도 같은 후각으로 그 비밀을 눈치챈 차출만의 협박에 못 이겨 절 땅까지 빼앗길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스님이 한몰댁과의 사이에 부정하게 아이를 두었다는 오해, 돈맛을 들여서 절 땅까지 팔아먹으려 한다는 마을사람들의 오해를 무릅쓰고 그는 한몰댁 모자를 지켜낸다.
이 작품에서 박정희의 유신독재정권, 차출만, 김명호를 고문한 정보부 직원 등은 남성원리의 가해자의 재현이며, 들몰댁, 한몰댁을 비롯하여, 차출만의 강간으로 임신이 되었지만 끝까지 아이를 지켜나가는 선경모, 그리고 한몰댁 모자를 끝까지 지킴으로써 불교의 자비심을 실천하는 지우스님은 모두 피해자이며, 동시에 여성성과 여성원리를 통해 피해자로서의 운명을 초월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차출만으로부터 강간당한 선경 모의 육체는 무력하게 희생당하는 민족, 타자, 피식민적 존재라는 강력한 알레고리로 재현되고 있다. 스피박의 표현을 빌자면 하위주체(subaltern)이다. 스피박이 하위주체의 희생당하고 착취당하는 경험으로부터 오히려 저항성을 갖는 주체를 개념화할 수 있다고 했듯 이들의 억압받은 경험과 희생의 경험에서 작가는 오히려 긍정적 자기인식과 치유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가해진 억압과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모성적 화해와 생명을 키우는 살림의 정신, 불교의 자비의 정신을 실천하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친일파-독재정권-반공 이데올로기-남성은 남성성과 남성원리로 젠더화하며, 그것에 대한 치유적 대안개념으로 여성성 내지 여성원리를 위의 인물들을 통해서 구현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작가 송기숙의 다른 남성작가와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송기숙은 가부장제와 반공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권력자 중심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며, 《은내골 기행》을 하위주체인 타자의 입장에서 씌어진 진정한 탈식민주의 소설로 형상화한다.
그렇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피해자의 용서가 아니라 가해자의 반성과 사죄가 아닌가? 진정한 화해는 가해자의 사죄와 피해자의 용서가 진심으로 만날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진정한 화해에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해자의 반성과 사죄가 없으며, 모순은 현재에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선경은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피해자이며, 정신분열증에 빠져 있는 우리나라의 병든 현재에 대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차출만의 강간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인 선경은 치유되지 않은 6·25라는 상처의 과거이고, 현재 반공이데올로기로 국민을 억압하는 정체체제의 피해자이다. 또한 언제 치유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이다. 그가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빠져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후기 식민주의 사회의 분열증에 대한 암시이다. 특히 정체성의 혼란으로 규정된 그의 질병은 후기 식민주의 사회의 병리적 증상(유신독제체제)을 상징한다. 작품에서 김명호의 친구인 정신과 의사는 모든 것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있는 선경에게 가장 중요한 처방이라고 말한다. 그의 출생에 관한 치욕스러운 과거를 은폐하지 않고 밝히는 일로부터 치료는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경 모와 주위 사람들은 치욕스런 과거에 겁에 질려 그 기억을 은폐하고 억압하고 망각하려고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망각되지 않고 오히려 선경의 정신착란의 환영적 이미지를 통해서 억압된 기억들은 출몰시킨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억압된 기억, 즉 무의식의 내용들을 상징적으로 재현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고통스럽더라도 어두운 과거를 방문하여 기억하고, 특히 따져 물음으로써, 즉 우리의 과거에 관해 엄정하게 사유하는 데서만 상처치유의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유신독재체제의 모순은 6·25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시 그 이전의 일제 식민지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친일문제를 따져 묻고 엄정하게 사유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주제의식이며, 바로 이것이 《은내골 기행》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런데 대학까지 졸업한 지식인 여성 선경의 발병은 하위주체 여성들 들몰댁, 한몰댁, 선경 모 등의 여성들이 그들의 삶에 가해진 억압과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긍정적 화해적 삶을 사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즉 스피박이 지식인 여성들은 하위주체 여성의 살아있는 경험의 보고(寶庫)에서 배울 것을 촉구했던 것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고문 이후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진 선경은 출생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친일적인 부패한 독재정권의 희생자로 남게 된다. 해결되지 않는 현재는 결국 길 위에서 작품이 끝나는 데서도 다시한번 확인된다. 독재정권의 부도덕성과 부패는 비밀리에 끌려갔던 김명호와 선경이 결국 부모들의 돈으로 풀려나게 되는 결말을 통해서 다시한번 고발되고 있다.
차출만이 강간하여 낳은 아이인 선경은 철저히 희생자로 남았지만 한몰댁의 아이는 좌·우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즉 북의 아버지와 남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길을 걷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통일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상태를 뛰어넘을 때에만 가능하며,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길을 한몰댁의 아이를 통해서 제시한 것 같다. 국민을 탄압하고, 가족을 이산시키며, 생명을 죽이는 권력자 중심의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이념보다는 인간애, 가족,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민중중심의 내셔널리즘을 작가는 강조한다.
(2)근대화의 허구성
탈식민주의는 식민지 시대보다도 식민지시대 이후의 문화적으로 식민종주국 문화에 대한 선망에 대해 문제삼는다. 작품은 문화적으로 당산제와 흙에 파묻혔다가 다시 나타난 선돌에의 민간신앙을 통해서 반외세의 탈식민주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은내골 사람들이 선돌을 다시 세우려고 하자 군청관료들이 미신이라고 욱대긴다. 또한 새마을 시찰이 나올 텐데 이런 걸 세워놓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다그치자 마을 노인들이 "어째서 예배당의 십자가는 미신이 아니고 이런 것은 미신이냐고 몰아붙이"는데 작가는 박정희정권이 추진한 반전통적이고 식민주의적인 근대화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민간고유신앙과 같은 토착적 문화의 전유(appropriation)를 통해서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미륵신앙도 권위적인 불교로서가 아니라 토착 민간신앙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국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종속되었으며, 미국중심의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종속된 박정희 독재정권은 서구지향적 근대화모델을 채택함으로써 작품에서 제시되고 있듯 고유신앙을 미신숭배라고 하여 금지시켰고, 새마을 운동을 통하여 농촌의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지붕으로 갈아 이게 하였으며, 담장도 흙 담장이나 돌담을 허물고 시멘트 담장으로 바꾸라고 지시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풍속을 급속하게 와해시켜갔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농민들이 원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농민들의 삶에 대한 질적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었는가?
은내골 주민들이 나누는 대화는 김우창이 지적했듯이 "단순히 관의 요구만이 아니라 상업적 이익과 경쟁적 개인주의의 욕심을 포함한 외부적인 원인이 우리의 건축원리로서 작용했던" 관 주도의 새마을 운동에 끼어 든 상업주의와 정경유착적 요소를 확인시키기에 충분하다.
"겉으로 유신이 어쩌고 멋이 으짜고 찬물 퉁기는 소리 잘잘 째도 속살로는 모두가 열녀전 끼고 서방질이랴. 속닥거리는 소리만 조금 낮아졌제 뒷손으로 오가는 실속은 더 커졌다더만."
"맞소. 지붕개량인가 멋인가 저런 짓거리도 겉으로는 새마을이니 헌 마을이니 요란법석을 떨어도 속살로는 스레또 공장 돌리는 재벌 몸들 농간이랍디다."
젊은이 하나가 나섰다.
"뭣이여? 그러면 지붕 개량하는 것이 스레또 공장 재벌들 돈벌이 시켜주자는 수작이라, 시방 이 말인가?"
결국 새마을운동은 반전통적이고 반농민적 근대화일 뿐만 아니라 부패한 정권의 정권유착에 의한 상업주의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 마을주민들의 대화에서 폭로된다. 식민화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피식민 민족이 식민종주국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물질과 문화의 괴리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표현, 가치관, 행동거지뿐 아니라 지식생산의 영역까지도 영향 입은 무의식의 식민화로 이어진다.
박정희가 추진한 근대화는 새마을운동의 달성이라는 신성한 임무의 형식으로 토착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위계화하며, 토착문화를 철저히 억압, 소멸시키는 과정을 동반했다. 작품에서 보듯이 관료조직을 동원하여 토착의 주거양식을, 그것도 외양만을 서구적 형태로 바꾸어나감으로써 서구문명에 대한 모방 욕망을 나타낸다. 즉 물질적 차원에서는 서구문명의 피상적 광채에 대한 모방 욕망을 강하게 드러내고, 정신적 차원에서는 선돌에 대한 민간신앙을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고 소멸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은내골 주민들은 부패한 유신독재정권이 강요하는 새마을운동, 즉 반전통적이며 강요된 근대화에 반발한다. 그들은 마을 주민 사이에 형성된 공동체 의식, 민간 고유신앙의 전유 등을 통해서 관 주도의 '새마을'과는 다른 마을 공동체를 구성해 나간다. 이것이 민중 주도적인 진정한 탈식민화의 길이라고 작가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빌 애쉬크로프트가 "식민지 이전의 절대적인 문화적 순수성을 회복하거나 그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즉 탈식민화는 필요하지만 식민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문화적 합병을 제안하며, 통문화적 혼성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탈식민화의 전략상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5.맺음말
본고는 김정한과 <지옥변>과 송기숙의 《은내골 기행》을 탈식민주의 비평론으로 분석해 보았다. 김정한의 작품은 일제 식민치하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된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정치상을 집중적으로 그려내며 탈식민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촉구했다. 송기숙의 작품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체제는 일제 식민통치와 분단이 남긴 식민주의적 또는 신식민주의적 유산이라는 사실을 주인공 명호의 은내골 기행을 통해 밝혀냄으로써 탈식민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촉구했다.
김정한의 작품이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된 해방직후의 혼란스런 사회상을 고발하며 탈식민화를 촉구한 작품이라면 송기숙의 작품은 해방 30년이 되도록 청산되지 않은 일제잔재의 모순을 박정희 유신독제정권의 억압적 정치상황과 연관지어 집중 조명했다. 김정한의 작품이 해방직후 탈식민화의 실패에 대한 고발과 비판에 머문 반면 송기숙은 탈식민화 실패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기억하기, 치유적 여성성, 민중공동체 등을 통해 탈식민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런 차이는 작가의 탈식민의식의 차이라기보다는 역사적 거리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본다. 즉 해방직후의 상황을 그린 김정한의 작품에서 대안까지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두 작품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식민통치라는 억압적인 근대 역사가 남긴 유산은 독립한 이후에도 계속 남아 훨씬 더 교묘하고 복잡한 형태로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동시에 탈식민화는 식민지배의 기억을 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잔재를 철저히 탐색해서 그것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것들에 대항함으로써만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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