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승원(이 작가의 문학앨범:13)
[국민일보] 1996-03-23
#“「상처 구멍」은 내 마음의 피난처”
# 피리불듯 소설몰두 세속아픔 치유
# 작품 속 인물통해 “여린 마음 보상”자위
아내나 아들딸한테 꾸중을 듣곤 한다. 식탁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들을 늘 못 알아듣곤 하는 것이다. 아들딸은 어떤 사건을 나한테 두 차례씩 설명하는 것을 짜증스러워 한다.
『아버지 우리 말 또 못 알아들으셨다!』
아들딸들은 자기들만 알아듣도록 이렇게 속닥거려 놓고 웃곤 한다.아내도 아들딸들에게만 무슨 말을 했느냐고 좌중을 둘러보고 물으면,아내와 아들딸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대곤 한다.
나는 요즈음 들어서야 그것을 알아차렸다.
『저 봐라. 너의 아버지 또 혼자 딴 생각하신다』
아내가 나 모르게 아들딸한테만 속삭여 말을 한 것은 바로 이 말인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앞에 앉은 사람의 말을 들으며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엉뚱한 영상을 보곤 한다. 그 영상을 주시하다가 나는 현실 속에서 지나가는 것들을 놓치곤 했다.
『다 배워도 운전은 배우지 마시오』
나의 그러함을 하소연하였더니 임권택 감독은 나에게 이렇게 충고를 했다.
나는 내 주인공들의 공화국 안에서 산다. 그 주인공들과 산책을 하고 그들과 여행을 한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그들과 함께 화장실엘 간다. 그들과 함께 잠을 잔다. 잘 풀리지 않던 소설이 꿈 속에서 풀리는 수가 있다. 그때 나는 뛰쳐 일어나 껌껌한 속에서 불도 켜지 않고 메모를 하여 두기도 한다. 불을 켜는 동안 그 생각이 달아날 것 같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러한 나 때문에 가끔 놀라곤 한다. 혹시 정신 이상이라도 되지 않았는가 하고 그러는 것이다.
○해방공간 「반동자」외톨이
『여보,당신 왜 그래요?』
나는 소설에 미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곤 했다. 모자,책보자기,신,연필,풀 뜯기러 간 소,보리 베러 가지고 간 낫…. 말하자면 영걸이 없는 아이였다. 그 영걸 없음이 지금의 나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 속에 들어와서 반드시 상처를 만들어 놓는다. 그것은 앙금으로 남기도 한다.
말을 잘 하지 않는 내성적인 사람의 그 상처 치유법은 혼자서 낑낑거리고 앓아대면서 덤벼드는 모든 것들을 씹고 또 씹어대기인 것이다. 속에서 피 흘리는 싸움을 통해 혼자서 치유하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내게 상처를 주었다. 시대가 상처를 주었다.그 어지럽고 두렵던 해방 공간의 좌우 이데올로기 속에서 주변의 나이 많은 친구들은 나를 반동자새끼라고 외돌토리로 만들었다.
○상처받기 쉬운 성격
아홉 살 되던 해에 나는 피리 부는 법과 피리 만드는 법을 먼 아저씨뻘 되는 어른한테서 배웠다. 늘씬한 대만 보면 잘라다가 그것을 만들어 불곤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멍은 낫자루를 뽑아,그 송곳같은 것 끝에 불을 달구어 뚫었다. 예리한 칼 끝으로 불구멍을 곱게 도려 팠다. 구멍과 구멍 사이의 알맞지 않은 거리나 크기 때문에 소리는 제대로 나지를 않았다. 나는 늘 안타까워하면서 피리를 다시 만들고 또다시 만들곤 했다. 시뻘겋게 불 탄 송곳으로 대나무의 표면과 속살에 푸지직 구멍을 뚫고 또 뚫었다. 그 상처난 구멍에 입술을 대고 슬픈 곡조를 불어대고 또 불어댔다.
이제 와 생각을 하니 내 내부에도 수없이 많은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해방,여순반란사건,6·25 따위의 시대가 뚫어 놓았다.살아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들을 혼자서 씹고 또 씹으면서 입은 상처의 구멍과 나 스스로 불을 일으키고 내 송곳 끝에 불을 달아 내가 내 속살을 뚫어댄 자학의 구멍들까지 합하면 그 얼마나 많은 구멍들이 뚫려 있을 것인가.
나는 상처를 잘 입곤 한다.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껄이는 우스개 말 한 마디에도 나는 상처를 입곤 한다. 상처를 입어도 흔적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흔히 너그럽다고 말들을 한다. 너그러운 것이 아니고 바보스러운 것일 터이다. 나는 어떤 누구에게도 그 상처받았음을 발설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옹졸함일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늘 대범한 척하곤 해왔다.
많은 것들을 빼앗기고도,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도 나는 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곤 한다. 그 빼앗김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어떤 운명적인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자위하곤 하는 것이다.
친구에게도,부모님에게도,형제들에게도,이웃사람들에게도 양보하고 늘 손해를 보곤 한다. 슬프게도 그 손해를 다른 어떤 것에서 보상받으려고 한다.
○외줄타기같은 글쓰기
나는 아픈 육신을 뒤척거리면서 내 영혼과 육신에 뚫려 있는 구멍에 내 입술을 대고 밤이고 낮이고 분다. 필닐니리,필닐니리. 그렇게 불지 않으면 내 영육의 아픔은 치유되지를 않는다. 무당이 신명나게 굿을 해대지 않으면 자기 신병이 치유되지를 않듯 나는 그렇게 신명나게 피리를 불어대지 않으면 아프곤 하는 것이다. 소리를 얻겠다는 그것은 어쩌면 운명적인 보상 심리일 것이다.
그것이 나의 소설일 터이다.
이제 나는 보다 나은 나의 삶을 향한 몸부림으로 그것을 쓰고 또 쓴다.
나는 비겁하고 덜 되어먹었다. 내 삶은 위조지폐같은 삶일지도 모른다. 비밀리에 통용함으로써 크게 남기려고 하는 사기꾼같은 삶일 지도 모른다. 그러한 나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수작이 소설쓰기일 터이다.
내 피리는 구멍과 구멍 사이의 거리나 크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피리는 아닐까. 구멍을 뚫을 때 가해진 성급한 열기 때문에 생겨난 어찌할 수 없는 금들 때문에 소리는 제대로 나지 않는 피리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청아한 소리를 얻기 위하여 내 피리에 늘 물을 흠뻑 적시어 불곤 하여 온 것이 아닐까. 물 묻혀 불곤 한 그 행위는 피리 구멍 주변에 더 큰 금이 벌어지게 한 것이 아닐까. 아,나는 만신창이가 된 피리인지도 모른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보다 나은 인물을 창조하고,그 인물로 하여금 내가 해내지 못한 일들을 하게 하려는 그것도 일종의 손해보고 난 나의 보상 심리일 터이다.
요즘 들어 이 생각을 했다. 나의 소설쓰기는 외줄타기 같은 기쁨과 슬픔이다. 잘 타 내면 박수 한 무더기를 받을 수 있지만 잘못 타면 곤두박질해서 목이 부러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외줄타기 말이다. 소설쓰기가 끔찍스러워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 쓰면 아프고,쓰되 잘 쓰면 박수 한 무더기요,잘못 쓰면 떨어져 죽어가기인 그 줄광대질하기 같은 하늘의 형벌,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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