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글 김석종기자
올해는 유난히 봄이 늦었다. 그러나 여기는 남녘땅. 전남 장흥 탐진강(耽津江)은 겨울의 긴장을 털어내듯 햇살을 반짝반짝 퉁기며 봄의 한복판으로 흘러드는 모습이 역력했다. 강변의 청보리는 벌써 녹색으로 부풀어올랐고, 느티나무는 연초록 잎새를 가득 피워냈다.
새벽녘. 억불산 며느리바위 위 뭉게구름 사이로 붉은 해가 솟아올라 허공 가득 빛을 뿌린다. 전남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 계곡에서 발원해 첩첩 산골짜기를 굽이굽이 흘러내려온 탐진강이 잠깐동안 붉은 빛으로 채색된다. 강물은 장흥땅 한복판을 지나 강진 구강포 앞바다에서 남해바다를 만난다. 강 길이는 대략 100여리밖에 되지 않는다. 수심이 얕고 물살도 느긋한 아담한 강.
장흥에 사는 환경사진작가 마동욱씨(43)가 탐진강 여행에 따라나섰다. 그는 1997년부터 탐진댐 수몰예정지인 고향마을의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아 사진집 '아! 물에 잠길 내 고향'을 펴냈다. 탐진댐은 2002년 말에 완공된다. 그러면 상류인 유치면 750여 가구 2,000여 주민들의 생활터전은 호수 밑바닥으로 사라지고 만다. 댐을 세우는 공사는 이미 상당히 진척됐다.
"탐진강은 은어떼가 노닐고 고둥이 많이 자라는 호남권의 마지막 맑은 물입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강풍경을 보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 겁니다"
'탐진'이라는 강 이름은 탐라국의 배가 신라에 조공하러 강진 구강포로 드나들었다고 해서 탐라의 '탐'과 강진의 '진'을 합쳐 붙였다고 한다. 탐진강의 상류는 장흥에서도 험한 산악권에 속하는 외딴 곳이다. 수몰 예정지인 유치면 일대는 이미 충분히 으깨져 예전의 풍경을 보기 어렵다.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던 정겨운 강마을은 곳곳이 파헤쳐져 뒤숭숭하다. 사람들은 보상금 받아들고 하나둘씩 고향을 떠나고 있다.
상류쪽 탐진강변에는 신라때 창건된 고찰 보림사(寶林寺)가 있다. 가지산 남쪽 기슭의 이 사찰은 댐 건설과 상관없이 온전하다. 인도 가지산 보림사, 중국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세계 3대 보림으로 불린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가장 먼저 개산(開山)했다. 비자나무숲에 에워싸인 경내 약수는 한국의 10대 명수로 꼽힌다. 절마당과 숲에는 봄꽃들이 당장 꽃봉오리를 터뜨릴 듯 봄기운이 가득했다.
댐 예정지를 벗어나면 강폭이 넓어져 비로소 강물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장흥읍으로 흘러드는 중류는 예로부터 탐진강의 으뜸 절경지로 꼽혔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한 옛사람들은 이곳에 창랑정, 부춘정, 경호정, 용호정, 동백정, 영귀정, 사인정, 독취정의 여덟 정자를 세웠다. 부산면 부춘리의 부춘정과 용반리의 용호정, 장흥읍 송암리의 사인정에서는 지금도 탐진강의 빼어난 서정과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부춘정 주변에는 기괴한 바위와 노송, 동백이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그려낸다. 곧 벚꽃도 흐드러지게 피어나 상춘객을 부를 것이다. 조선시대 장흥이 배출한 문장가 백광훈은 '비 갠 맑은 강에 강물은 잔잔한데 강가 짙은 꽃 속에서 푸른 물로 목욕하네'라는 시로 부춘정(富春亭)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었다.
물줄기는 장흥읍을 관통한다. 장흥읍내에서 동교를 건너면 칠거리. 이곳에서 상류쪽 신흥리까지는 아름드리 나무들과 대숲 사이로 한적한 길이 나 있다. 강 안팎에 갈대숲이 우거진, 짧지만 멋진 강변 드라이브 코스. 강물 위로 야트막이 놓인 시멘트 다리도 정겹다.
칠거리 남쪽 만물절곡 주변은 아름다운 수초숲이 작은 섬처럼 무리지어 떠 있다. 여기에 텃새가 돼버린 백로, 왜가리떼까지 날아들어 그림같은 강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항상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탐진강에는 1급수에서만 사는 천연기념물 330호 수달과 천연기념물 258호 무태장어, 은어, 고둥, 큰납지리 등이 서식한다. 지난해 7월에는 강진군 강진신문의 임영관씨가 탐진강 수중보의 어도를 따라 올라가는 수달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그만큼 탐진강의 물이 싱싱하고 깨끗하다는 증거일 테다. 탐진강이 강진만 바다와 만나는 하류에서는 겨울철 진객 중의 진객인 천연기념물 201호 큰고니떼를 15마리나 볼 수 있었다. 이 땅의 겨울처럼 계절을 잊은 모양이다.
상류쪽에 오염원이 전혀 없는 이 땅의 마지막 청류(淸流) 탐진강. 그러나 조만간 지도와 풍경이 딴판으로 바뀔 서글픈 강. 아쉬움과 아까움 때문에 봄빛은 더욱 푸르고 꽃향기 더욱 진하다.
▶여행길잡이
교통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광산IC에서 나주방향 13번 국도로 갈아탄다. 나주 영산동 갈림길에서 29번 국도를 따라가면 탐진강 상류인 유치면. 송정리에서 13번 군도가 봉덕계곡과 보림사에 닿는다. 장흥읍내에서 2번, 13번 국도를 따라 강변도로를 드나들며 탐진강을 돌아볼 수 있다. 곳곳에 도로가 끊겨 있다. 서울강남터미널에서 장흥까지 고속버스가 4회 운행되며, 광주에서 장흥까지는 2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 목적지에 따라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숙박 장흥읍내에 장흥관광호텔(061-864-7777), 그랜드파크모텔(863-0042) 등 호텔.여관이 많다. 보림사 입구쪽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보림산장(864-1993)과 가지산장(864-2470)이 있다. 유치면 신월리 월암마을에는 울창한 숲속에 유치자연휴양림(863-6350)이 있다. 숲속의 집(3만∼8만원)과 물놀이장, 야영장 등을 갖췄다.
음식업소 장흥군청 정문 앞의 신녹원관(863-6622)은 30여가지 푸짐한 상차림의 한정식집. 2명 3만원, 3명 이상부터는 1명당 1만2천원. 남흥식당(863-8888)은 곰탕(5,000원)으로 유명하다. 수문해수욕장 근처의 바다하우스(862-1021)와 삼화관광횟집(862-9993)에서는 득량만 갯벌의 바지락회와 키조개를 맛볼 수 있다. 한접시 2만∼3만원.
명소 장흥은 철쭉으로 유명한 제암산과 호남 5대 명산의 하나인 천관산, 억불산 등 명산이 많다. 장흥 위씨 집성촌인 방촌 문화마을에는 호남 실학의 대가 위백규 선생의 생가가 있다. 유치면 늑룡리 금사마을은 황새의 집단서식지. 장흥 남부지역은 득량만의 청정수역으로 '바다낚시의 천국'이다. 득량만의 회진항을 가운데 두고 작가 한승원과 이청준이 태어나고 자랐다. 장산마을에는 한승원의 생가와 문학비가 있다. 이청준은 진목마을에서 태어났다. 장흥군청 863-2509
s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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