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그리고 그림자'
분위기 좋은 찻집이나 고급 레스토랑에 어울릴 것 같은 이 이름은, 그러나 팥죽 김밥 칼국수 김치찌개 등을 파는, 조그마한 분식집의 상호이다.
이 상호의 작명인이 소설가 한승원씨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으나, 사장이 누구라는 것을 모르면 장흥에서는 '절반 간첩'이다.
마동욱!
10여년간 수몰예정지 유치에 카메라 렌즈를 조준해온 그답게, 일용할 양식과 몇 컷의 필름값을 마련하기 위해 차린 분식집 이름마저 카메라의 기본 원리라 할 수 있는 '빛 그리고 그림자'로 내걸었다. 그의 삶도 분식집의 상호와 꼭 닮아 있다.
수몰예정지 유치는 마동욱(43세·다큐멘터리 사진가)씨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마씨의 고단한 발품이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경향신문-매거진 X'에 전면 통으로 기사화된 것이 지난 97년 초, 빛의 시작이었다.
서울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쥐 풀빵구리 드나들 듯 고향 땅 장흥에 내려와 찍은 사진이 지면과 공중파를 통해 본인의 이름과 함께 탐진댐의 현실을 널리 알려주었다.
빛의 멈춤없는 전개.
유치 전역을 샅샅이 훑어 사진집 '아, 물에 잠길 내고향'을 발간한 때가 98년.
88년도부터 찍기 시작한 유치사진 작업이 꼭 10년째 접어든 해, 이때가 그에게 빛의 정점에 해당한다.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KBS 신TV문학관-나는 집으로 간다'의 주인공 이름이 마동욱(김명곤 분)이고, 그의 극중 직업이 사진작가인 점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신TV문학관은 마동욱과 수몰유치에 대한 일종의 헌시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마씨는 두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그림자가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의 작업으로 사진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가산이 탕진된 것이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마씨가 '뜬' 것을 시샘한 일부 지역인사들이 "불쌍한 유치를 딛고 본인의 이름을 알린다"며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마씨는 서울생활을 정리했다. 정리라고 해봐야 빚밖에 없었지만, 고향 선후배들의 오해도 풀어야했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그리고 더 많이 유치를 찍기 위해 낙향했다.
그야말로 맨주먹 붉은 피였다. 아니, 맨주먹은 아니었다. 그 좋던 기자재 다 처분하고 손에 쥔 것은 3570줌렌즈를 장착한 니콘801S 카메라 한 대뿐이었다.
―그거 한 대 가지고 좋은 사진 나오겠습니까?
=좋은 목수는 연장 탓하지 않는다네.
마씨는 새벽시장을 보고 나서 유치로 달려갔고, 특수제작한 대형철가방으로 점심배달을 끝내고 나면 또 유치로 줄행랑을 쳤다.
저녁이 되면 현상된 필름을 정리하고… 장흥에서 마동욱을 모르면 절반만 간첩이지만, 유치에서 그를 모르면 150% 간첩이다.
수몰민들이 논밭을 갈고 있거나, 도청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거나, 철거된 집앞에서 젖통을 드러내며 울부짖고 있을 때 어김없이 한발치 뒤에서 혹은 옆이나 앞에서 마씨의 카메라가 찰칵찰칵 돌아간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유치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없으면 오히려 불안할 정
도다. 섬뜩하리만치 생생한 수몰민 인물사진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10년이 넘는 마씨와 수몰민들 사이의 유대관계가 유치사람들로 하여금 마씨의 카메라 앞에서 굳어지지 않게 한 것이다. 다큐사진의 첫 출발이 피사체와 친해져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올여름 마동욱씨는 한달여간 유치를 떠나 외도를 했다. 동향의 후배인 시인 이대흠씨와 목포에서 문산까지 꼬박 32일간 철길을 걸은 것이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이 여행은 마씨의 기획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유치에만 매달려 감각이 둔해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린 장인의 본능이 자신의 몸을 의도적으로 혹사시킨 것이다.
또 하나, 마씨의 다큐철학이라 할 수 있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 그로 하여금 철길을 걷게 했다. 철길과 댐은 개발과 수탈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었고, 물속에 마을이 잠기듯, 호남선은 복선화 작업으로 그 옛 흔적을 지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물에 잠길 내고향'이 간행된 것과 닮은 꼴로 이번 철길도보여행의 성과가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다지리 刊)에 요약되어 있다.
지금 마동욱씨는 다시 유치를 찍고 있다.
백두대간 탐진지맥의 능선을 오르내리며, 장흥의 '마을'들도 함께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내년이면 유라시아 횡단 철도를 타고 이국의 풍경도 담아볼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선 부지런히 철가방을 들어야 한다.
댐·철도·마을·유라시아·한승원·철가방…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어휘들이 참으로 절묘하게 구겨져 마씨의 필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것들 모두는 지금, 빛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니다.
50만원짜리 엑셀을 타고 카메라를 휘두르며,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돌진하는, 우리시대의 돈키호테 마동욱의 인생은 언제 인화될 것인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인화된 모습에 빛이 많을지 그림자가 더 짙을지, 아니면 노출 적정일지…
이정우 기자(arrti@jeonlado.com)
전라도닷컴/2000.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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