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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인산 서문암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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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산 100배 즐기기
일요시사/2003.03.12
1653년 8월 16일 제주도 모슬포 부근 해역에 낯선 네덜란드인 선원들이 초죽음 상태로 나타났다. 하멜을 포함한 64명의 선원을 태운 네덜란드 상선이 대만에서 일본 나카사키를 향해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다가 36명만이 구사일생으로 제주도에 상륙한 것이다.
이들은 1654년 5월 서울로 압송되고, 14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게 된다. 억류생활 14년만에 일행 7명과 함께 어렵게 한국을 탈출한 하멜은 고국에 돌아가 ‘하멜표류기’라는 기행문을 썼고, 이 책은 우리 나라를 서방 세계에 알린 최초의 문건이 되었다.
강진 병영에는 지금도 하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병영의 한골목이라 부르는 골목에 남아 있는 빗살무늬 담장이 그것이다. 하멜이 살았다는 집 앞에는 600년의 세월을 지켜온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병영은 이름에서도 풍기듯이 조선조 500년 동안 전라도 육군의 총지휘부로서 전라도 병영사가 있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월출산 동쪽 자락에서 장흥 가는 길로 강진군 옴천면을 지나자 그리 높지는 않지만 철옹성 같은 산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그 옆으로 병영의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병영에 들어섰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병영초등학교와 민가의 담으로 일부 남아 있는 병영성의 모습과 현재 복원 중인 어수선한 풍경이 전부이다.
그러나 유형적인 모습만이 역사는 아닐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500년 동안 전라도 전역과 제주도까지 포함해 53주 6진을 관할했던 병영사의 위세를 가슴으로 느껴보는 것 또한 무형의 역사를 맛보는 것.
홈골저수지로 통하는 길을 따라 수인산으로 향한다. 가을을 떠나보낸 텅 빈 들판에 스산한 바람이 지나간다. 나는 이런 비어있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포근함을 느낀다. 마을의 감나무에 매달린 감이 너무도 정겹다. 저 따지 않은 감들은 겨우내 까치들의 양식이 되고, 하얀 눈 속에 핀 빨간 꽃이 된다.
홈골저수지 둑 위로 올라서자 산등성의 철옹성 같은 절벽들이 위압적이다. 특히 병풍바위의 위세가 당당하다. 저수지에서는 청둥오리가 떼를 지어 평화롭게 유영하다가 일제히 비상을 한 후 다시 물위에 앉곤 한다.
홈골저수지를 왼쪽으로 돌아서고 나서야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올라갈수록 홈골은 협곡으로 변하고 분위기도 음습해진다. 홈골재에 가까워지자 양쪽으로 철옹성 같은 바위가 버티고 있다. 우리는 신들린 사람들처럼 절벽 사이의 가파른 길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올라간다.
수인산성 북문이 있었던 홈골재이다. 밑에서 볼 때 절벽을 이룬 바위가 험준했는데, 막상 북문에 올라서니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평지가 우리를 맞이한다.
봉수대가 있었던 정상 노적봉에 올라서니 천연요새를 이룬 수인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 밖으로는 사방이 절벽을 이루고 있고, 안쪽은 평지를 이루고 있어 유사시 피난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더군다나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 외적의 침입을 한눈에 바라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지형적인 특색이 수인산성을 축조하도록 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다.
수인산성은 고려 때인 1377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안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우리 역사이고 보면, 유사시 급히 피하여 적을 방어해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전라도 병영사를 저 아래 병영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도 이곳에 축조된 수인산성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수인산성은 병영성의 전략적 요충지라고 볼 수 있겠다.
확 터진 전망 덕분에 주변의 여러 산들이 금방 시야에 들어온다. 서쪽으로 월출산의 아름다운 바위 모습과 그 남쪽으로 해남의 흑석산이 자리잡고 있고, 덕룡산과 주작산·두륜산·달마산이 살아있는 용처럼 꿈틀거린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장흥의 부용산과 제암산이 포근하고, 남쪽으로는 천관산이 뚜렷하다. 제암산과 천관산 사이에는 장흥 안양쪽 바다가 출렁이고, 제암산 동쪽으로는 보성 율포 앞 바다가 푸르다. 그리고 남쪽 아래로 장흡읍내가 바라보이고, 서쪽 아래로는 병영면 소재지와 널따란 들판이 평화롭다. 이처럼 수인산은 주변의 산과 들판,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곳 수인산은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왜구의 침범을 피하기 위한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고, 동학농민전쟁 때는 장흥 석대들에서 패퇴한 동학교도들이, 일제 때는 항일운동가들이, 해방직후에는 빨치산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넓은 들판과 겹겹이 쌓인 산줄기 그리고 멀리 보이는 바다는 조물주가 만든 자연스러운 질서지만 그 속에는 이처럼 치열한 인간의 골육상쟁이 있는 것이다. 나는 수인산 정상에 서서 자연의 질서대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기원한다.
북문으로 다시 내려와 성의 흔적들을 밟고 걸어간다. 성을 쌓은 지 수 백년이 지났지만 성의 모습을 찾는데는 크게 어렵지 않다. 작은 돌로 차곡차곡 쌓은 성은 무너지고 사라지곤 했지만 유심히 바라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모습을 금방 알 수 있다.
서문에 도착하니 주변의 바위들이 범상치 않다. 병풍바위라 불리는 바위로, 수인산의 명물이다. 병풍바위는 수십 미터 높이로 우뚝 솟은 세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졌다. 바위는 석회석 같고, 절벽을 이룬 바위면은 중간중간 심하게 패어 있다. 멀리서 볼 때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해서 병풍바위라 부르지만, 가깝게 보는 병풍바위는 괴물 같기도 하고,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수인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이 있다. 이 중 동문만이 유일하게 장흥 유치쪽에 위치하고 나머지 세 개의 문이 강진 병영 방향이다. 서문에서 수인사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나목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과 함께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는 낙엽이 고향집처럼 포근하다.
사철 푸른 상록수보다도 봄이면 새싹이 돋고 가을이면 낙엽이 지는 활엽수가 있어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변화와 함께 인간도 변화해 가면서 더욱 성숙한다.
장갑수 산행전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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