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2003년 07월 28일
◇예비 번역가를 위한 문학기행
‘남도 땅 장흥에서도 버스는 다시 비좁은 해안 도로를 한 시간 남짓 내리달린 끝에, 늦가을 해가 설핏해진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종점지인 회진으로 들어섰다’
영화 ‘서편제’의 원작소설인 이청준의 단편 ‘선학동 나그네’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는 양 날개를 뻗친 학 모양의 관음봉이 만조때면 물그림자를 드리우는 자신의 고향, 전남 장흥을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 찾았다. 장마 끝 후텁지근한 날씨지만 늙은 아비와 눈먼 딸의 고달픈 소리꾼 인생이 담긴 장소는 신비스런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인근 생가마을을 비롯해 장흥군 일대는 이청준의 작품 20여편이 탄생한 문학의 산실이다.
그와 동행한 사람은 한국학을 공부하는 외국인·교포 학생 16명이다. 한국문학번역원(원장 진형준)이 올해 처음 마련한 8주간의 예비번역가를 위한 단기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들은 지난 24~26일 작가와 함께 백양사·소쇄원·운주사를 거쳐 장흥·해남·강진 일대를 돌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도 고전문학 강사로 동행했다.
선비문화와 민중문화의 정수를 동시에 간직한 남도 가운데서도 장흥은 특히 인상적인 장소였다. 이곳은 이청준·한승원·송기숙·이승우 등 현대작가를 배출했고, 남도실학의 선구자인 위백규 선생(1727~1798) 등이 남긴 향반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작가 54명의 문학비를 세워놓은 천관산 문학공원도 장관이다.
단장을 짚고 모자를 눌러쓴 채 문학기행의 안내자로 나선 이청준은 손금을 보듯 장흥을 훑어나갔다. 첫 행선지는 가지산 보림사였다. 이곳은 국보 117호인 철조비로사나불과 사천왕상에서 나온 복장유물로 유명한 절이지만 이청준의 장편 ‘흰옷’의 무대이기도 하다. 작가는 좌·우익으로 나뉘어 싸우다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절앞 풀밭에서 해원의 굿판을 벌였다.
보림사와 가까운 탐진면 일대는 댐 건설을 위해 산 밑동의 나무를 홀랑 깎아낸 살풍경한 모습이다. 장차 물속에 잠기는 곳 가운데는 이청준이 유학시절 고향집을 오가던 77번 국도가 있다. 어느날 술을 잔뜩 마셔 속이 거북한 채 서울로 돌아가던 그는 비가 많이 와서 뻘에 버스가 빠진 채 꼼짝 못하는 와중에도 엿을 사먹느라 아우성치던 사람들을 회상하면서 단편 ‘살아있는 뻘’을 썼다. 가난한 이들의 질척거리는 일상에서 뻘의 생명력과 그 깊은 바닥을 연상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작가가 털어놓은 가난에 대한 기억 한 토막.
“우리 어릴 때는 소풍에 빈손으로 오는 아그덜이 더러 있었지요. 어느날 소풍을 가는디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나보다 조금 어린 아들내미를 빈손으로 내게 밀면서 ‘니가 형이니까 부탁한다’고 하더만요. 우쭐하면서도 도시락을 뺏길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나뭇가지를 꺾어서 젓가락을 만들어 와보니 벌써 도시락에 머리를 콱 쳐박고 3분의 2는 먹었어요. 남은 거라도 먹으려고 머리를 떼어내는디, 아따 절대 안떨어지드만요. 그날 배 고픈 채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는디 왜 그리 하늘은 파랗 던지”
그런 그에게 큰산(천관산)은 넓은 세상을 향한 관문이었다.
‘큰산 꼭대기 구룡봉에서 바라본 세상은 끝없이 넓었다. 작은 동산같던 그의 마을 뒷산 너머로 남해의 푸른 바다가 아득히 하늘로 이어져가고, 북으로는 수많은 산들이 부연 연무 속으로 겹겹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해발 300ｍ에 위치한 천관산 문학공원의 이청준 문학비에는 ‘인문주의자 무소작씨의 종생기’란 작품에 등장했던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렇게 크게만 보이던 천관산을 넘어 광주로, 서울로 갔던 작가가 다시 고향을 자주 찾기 시작한 건 불과 10여년 전이고, 더구나 그의 유년에서 가장 큰 상처였던 생가를 찾은 것은 중학시절의 어느 겨울 이후 올해 초가 처음이었다.
장흥 기행 마지막 코스는 장흥군 회진면 진목마을 이청준의 생가였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단편 ‘눈길’(77년작)은 30권의 문학전집을 가진 작가가 가장 애착을 느끼며,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속에 써내려갔던 작품이다.
‘눈길’의 화자인 ‘나’는 쓰러져가는 시골집 방 한칸에 홀로 된 형수·조카들과 함께 사는 노모가 부담스러워 고향을 멀리 한다. 어느날 아내와 함께 노인네를 찾았을 때 평소 자기주장이 없던 노모는 어렵사리 지붕개량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그 소망을 묵살하려 하지만 그것이 불만인 아내는 노인네로부터 제법 번듯했던 옛날집과 어느 겨울 모자의 쓸쓸한 이별이야기를 끌어낸다.
형이 술로 가산을 탕진해 살던 집까지 넘어가게 됐는데 어머니는 대처에서 공부하던 차남을 맞으려 빈집을 지킨다. 장롱 하나 덜렁 있는 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모자는 꼭두새벽 마을사람들 눈을 피해 눈길을 밟으면서 면소 차부를 향한다.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오고 아들이 훌쩍 떠난 뒤 어머니는 망연자실 길목에 서있다가 눈위의 아들 발자국을 되밟아 집을 향한다. 그러나 갈 데가 없는 그녀는 언덕에 앉아 마을의 아침 짓는 연기를 바라보는데 자기집 지붕에 반사된 눈빛에 눈이 시린다.
“내가 ‘눈길’을 쓸 때까지 마음속 어머니는 계속 추운 길목에 서 계셨어요. 그 작품을 쓴 뒤 비로소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냈지요. 문학은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눈길’의 느낌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옛집을 찾지 않았어요”
작가는 쓸쓸한 눈빛이었지만 ‘눈길’을 미리 읽고, 그 장소까지 돌아본 학생들은 작가에게 여러가지 질문과 느낌을 쏟아냈다.
“왜 주인공을 그렇게 못된 사람으로 그리셨나요. ‘노인네에게 빚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는 뭐지요”
“어머니가 아들 발자국을 되밟아 돌아올 때 울컥 눈물이 났어요”
“작품속 풍경 묘사가 그림처럼 생생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청준이라는 작가를, 한국문학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눈길’의 서늘함을 맛본 이들은 삶의 비애를 위로하는 이야기의 힘을 공감했을 터였다.
-‘예비번역가 연수’80여명 지원, 대부분 한국학 공부하는 외국인-
지난달 예비번역가를 위한 단기연수 프로그램 참가자 모집공고를 냈을 때 번역원 담당자들은 깜짝 놀랐다. 당초 연수대상을 10여명으로 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8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려든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재외교포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학을 공부하는 외국인이었다. 결국 연수인원은 24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중 외국인이 19명이다. 이번 참가자 가운데 미국인 나수호, 중국인 이려추·김예령은 서울대 박사과정에서 나란히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꾼 나수호씨는 구비문학 전공자로 ‘별주부전’을 인디언 설화와 비교하는 내용으로 석사논문을 썼다. 그는 “원래 신화나 역사를 좋아해 고전문학을 택했다”며 “고전소설, 판소리도 재미있다”고 말했다.
미국인 레이프 올슨은 고전소설을 패러디한 현대소설에 관심 있는 한국문학 전공자다. 그는 학부때 선교사로 한국에 2년 동안 머문 뒤 학부 전공인 영문학 대신 한국문학으로 전환, 현재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자신이 번역중인 서하진 소설 ‘홍길동’의 자료수집 등을 위해 4개월째 한국에 머물고 있다.
벨로루시 출신인 타티아나는 KBS 교향악단의 호른 연주자인 부친을 따라 10년째 한국에 살았다. 현재 한국 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에 재학중이다. 폴란드인 안나 파라도프스카는 지난해 서울대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황석영 단편을 폴란드어로 번역중이다. 외국인 연수생들의 국적은 중국이 5명으로 가장 많지만 튀니지·인도네시아·이탈리아·베트남 등 다양하다.
이들은 남도문학기행과 다음달 김유정문학관 탐방 등 2차례 현장답사를 하고 정민 교수, 이남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 번역가 안정효씨의 강의를 듣는다. 번역원 박혜주 박사는 “첫 연수지만 문학번역 인력풀이 두껍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내년에는 난이도가 다른 강의를 편성하는 등 더욱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흥/글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