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개/수인산 홈골재
'소리 높여 슬피 울며' 넘어가던 길
글·송광룡/ 사진 ·이종국
얼굴에 와 닿는 햇볕은 따거워도 귓볼을 스치는 바람은 서늘하다. 가을이 온 것이다. 태풍 지나간 하늘은 푸르기가 바다와 같고, 구름은 군데군데 쌓인 눈더미처럼 희다. 그 구름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녘으로 이동하여 바람의 방향을 알게 한다. 해는 들락날락하고, 그 때마다 修仁山(수인산) 등성이와 골짜기들이 밝거나 어두워진다. 푸른 녹빛이던 산은 남빛이 되었다가 햇살이 들면 다시 녹빛으로 변하곤 한다. 하― 하고 깊은 숨을 몰아쉬어 본다. 산이 신령한 기운을 띠는 순간이다. 저 산에 홈골재가 있고 수인산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어느새 경건해진다.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거슬러 길은 휘어지며 산 속으로 들어간다.
암벽 사이 움푹 패인 골짜기의 재
수인산은 강진군 병영면과 장흥군 유치·부산면의 경계를 이룬다. 그 높이는 해발 561m에 지나지 않지만, 산세가 험하여 어느 쪽으로도 오르기가 쉽지 않다. 장흥군 유치면 대리로 통하는 동쪽을 제외하고는, 강진군 병영면에 닿아 있는 나머지 방향이 모두 자연 성벽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가파르다. 천혜의 요새인 셈이다. 그래서 수인산에는 옛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수인산성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으며 그 둘레는 6킬로미터를 넘는다. 병영으로부터 매우 좁은 길이 빙 돌아서 성의 남문에 이르고, 문 밖의 지세는 두 사람이 함께 설 수 없을 만큼 핍박하다. 북문은 더욱 험절하다. 동문은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으로 문 밖에 수덕한 산세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서·남·북 3면은 천험하다. 상대적으로 완만한 동문은 옛 성 밖에 개천을 만들고 빙 둘러 성을 쌓아 이중으로 적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성 안에 들어서면 평지가 있어 우물이 6개나 있으며, 정상인 노적봉에는 봉화대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병영은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의 총지휘부인 전라도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이다. 兵營(병영)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1417년(태종 17년), 광산현(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 있던 전라병영이 왜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옮겨오면서 수인산은 전략적 요충지로 더욱 각광을 받았다. 정상인 노적봉의 봉화대는 왜적이 침입한 사실을 산 아래 병영성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고 산성은 강진, 장흥, 보성, 영암 등지의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 수인산성의 북문이 있는 홈골의 맨 윗자락에 홈골재가 있다. 노적봉 비탈에서 내려다보면 골짜기로 빠지는 고갯길 양 쪽에 높게 치솟은 암벽이 두드러지는데, 그 형상은 토끼나 당나귀의 쫑긋 선 귀와도 같고, 그 기세는 소의 뿔처럼 드세다. 홈골재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렇듯 솟아오른 암벽 사이로 움푹 패인 골짜기의 형상에서 지어졌을 터이다.
'한바웃재'와 '천혜의 요망대'
홈골재에 오르려면 병영면 지로리에서 길을 잡아야 한다. 마을 위에는 수인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을 가두어 둔 홈골저수지가 있다. 그 저수지를 끼고 곧장 들어가면 병풍바위와 산성의 남문에 이르고, 저수지둑을 타고 반대편 골짜기로 들어가면 홈골재와 산성의 북문에 이른다. 옛날 병영의 관원들은 좀 더 완만한 남문을 이용하였고, 백성들은 가파른 홈골을 올라 북문을 이용하였다는 말을 장흥군 문화공보과의 양기수씨에게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옛날 죄인들의 머리를 베어 걸어두던 병영성의 北將臺(북장대)가 바로 지금의 저수지 자리에 있었노라고 했다.
들판에는 병영성, 산에는 산성이 버티고 있는 길을 백성들이 맘 편하게 다녔을 리 없다. 홈골재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무시로 오르내릴 만한 고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넘나들던 길은 따로 있었다. 그 길은 홈골로 들어서기 직전 '한바웃재'를 넘어 장흥군 유치면 대리로 빠지는 길이었다. '한바우'란 큰 바위를 뜻하니 지로리로 뻗어나온 산봉우리 오른쪽에 솟은 바위를 가리키며, 한바위재는 그 바위 밑으로 난 고갯길을 말한다. 그러나 산성을 조심스레 돌아 유치를 오가던 그 길은 이제 잡목숲에 묻혀버려 옛 지도에서나 그 흔적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한바윗골을 돌아나와 홈골로 들어서니 수런거리는 것은 나뭇잎이요, 소란스러운 것은 물소리다. 계곡물은 눈이 시리도록 맑아 잠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흐르는 땀을 씻고도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산길이 만만치 않았다. 길을 가린 나뭇가지는 이마를 때리고 무성한 수풀은 자주 발을 헛딛게 했다. 그나마 허물어진 길을 돌아 한 고비 넘어서면 바윗길이었다. 금세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내내 들끓던 것들이 가라앉아 고요해지고, 죽어 있던 것들이 차츰 살아나 안팎으로 교차하는 느낌! 물방울이 바위 틈에서 똑! 하고 떨어지는가싶더니 간간이 드는 햇살을 받아 바람이 나뭇잎과 함께 너울너울 춤을 춘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에는 푸른 이끼들이 이불처럼 둘러 덮였다. 그 갈라진 돌틈에서 자란 소나무라니! 자라지 못한 키로도 청청한 잎을 거느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것이 마치 바위가 숨을 쉬는 듯하다.
그 쯤에서 뒤를 돌아보면 병영 들판이 협곡 사이로 아스라히 내려다 보인다. 한말 때까지만 해도 3천여 가구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군사도시였던 병영은 지금 1,300여 가구가 산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이하곤(1677∼1724)은 강진땅을 여행하면서 지은 「강진잡시」의 제 3수와 5수에서 전라병영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 돌 저 돌 모아 오밀조밀 보조성을 쌓은 곳
군사들 주둔하는 이 성이 전라병영이라네
거주민은 거의 3천호에 이르는데
대개가 군관과 병영의 군속들이라네
병영 자리는 천혜의 요새지로
탁 트인 들 가운데로 잔잔히 내 흐르고 사방엔 산
기암괴석 솟은 봉우리 바로 수인산이네
병영성 밖 기이한 장관은 요망대라네
그 '요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이 골짜기를 올라오는 적들을 막아내기란 널린 돌만 굴려도 충분할 듯 보인다. 그럼에도 1555년 을묘왜변 때에는 왜구를 막아내지 못해 성이 허물어졌다. 수인산성이 무너졌으니 발 아래 병영성이야 일러 무엇하랴. 병마절도사 원적은 적을 막아낼 엄두조차 못한 채 죽음을 당하였다. 전라병영은 장흥으로 옮겨갔다가 폐허가 된 성을 보수한 1604년에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한 몸으로 백 가지 어려움을 만났으니'
당시 병영의 문인 懈菴(해암) 김응정(1527∼1629)은 「병영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문(請移兵營疏)」에서, '백성들이 겪고 있는 일 가운데 소리 높여 슬피 울며 피눈물을 흘릴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을묘년이나 임진, 정유 등의 왜란 때 병마절도사가 국난을 구할 겨를도 없이 죽거나 패한 원인을 병영진이 전라도의 중심에 있지 못한 데서 찾았다. 육지를 관할하는 병영이 좌 . 우수영과 같이 해안에 있어서 왜적에게 함락되면 내륙이 곧 적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가 적은 병영의 실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군인이란 만약을 대비해야 하는데 병영에는 남다른 무기조차 없어 안타깝습니다. 그곳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물건은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군인으로 뽑힌 자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으로 공급토록 하고 있으니, 침략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물건을 팔고 사는 일만 재촉하고, 그것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여러 세금을 한 해에 세 번씩이나 바치고 있습니다. 한 몸으로 백 가지 어려움을 만났으니 피땀이 날마다 마르고 객지를 떠돌다 굶어 죽는 시체가 해가 갈수록 늘어납니다. 이러한 일로 받는 괴로움과 해가 가족과 친척에게 미치고, 재앙은 이웃이나 마을에 미쳐 벼슬아치를 원망하게 됩니다.
자기들에게 정해진 근무 날짜를 맞추기 위해 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진 채 머나 먼 거리를 온종일 걸어서 옵니다. 등과 어깨, 발바닥이 부르트고, 병영의 문에 도착하면 몽둥이를 맞아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집니다. 세금으로 바칠 무명베가 한 치라도 모자라고 쌀이 한 줌만 모자라도 매를 맞아 옷은 피로 물들고 발에는 차꼬가 채워지고 손에는 수갑이 채워집니다. 자기 집은 멀리 있어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없으니 두려움과 아픔은 계속되고, 병영 근처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돈이나 물건을 빌면 갑절 이상이나 다섯 갑절로 갚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논밭이나 집을 지키지 못하고 아내나 자식을 돌볼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예 머리를 깎고 숨어서 살고 어떤 이는 집을 버리고 남의 고을을 떠돌아 다니면서 죽고 없는 것처럼 속이기도 합니다.
해암의 글은 당시의 병영과 군역의 실상이 얼마나 어이 없고도 참담한 것이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부당한 군역에 시달린 군졸들은 병영 인근의 민간인을 또한 괴롭혔을 것이다. 해암은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으므로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해암은 병영면 삭둔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고향에서 보낸 유학자이자 빼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말년에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정유 양란 때는 강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논밭과 노비를 팔고 손수 소금을 구워 마련한 군량미 5백석과 소금 3백 가마로 고경명과 조헌 장군을 도왔다. 강진읍 군민회관 뒤에는 그의 시가비가 세워져 있고, 군동면 덕천 마을에는 그를 모신 德湖祠(덕호사)가 있으며, 병영면 용두 마을에는 그가 후학을 양성했다는 서당이 남아 있다.
'쉰세골' - '쉰골' - '쉰산' - '수인산'
홈골재에서 길은 산의 정상인 노적봉과 동문이 있는 유치면 대리, 그리고 남문이 있는 병풍바위 쪽으로 갈라진다. 노적봉에서 흘러내린 평원은 드넓고, 어느새 은빛으로 머리가 세어가는 억새들이 비단결처럼 펼쳐져 있지만, 그만큼 길의 자취는 가뭇하다. 호젓함과 고요함은 이내 외로움과 적막감으로 뒤바뀌고, 까닭모를 조급증과 무서움이 밀려든다.
머리와 이마, 콧잔등과 주둥이를 가리지 않고 거미줄은 엉켜들고, 거미들은 가끔씩 볼이나 목덜미에 달라붙고는 한다. 이미 오래 전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이리저리 휘저어 걷어내 보지만,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갈수록 흔적 없는 길이다. 턱도 없이 넓은 공간의 이 쪽과 저 쪽을 위태롭게 오가며 허공에 길을 내는 거미들이 되려 부러울 판이다.
그래도 평원을 가로질러 산비탈을 타고 병풍바위 쪽으로 나아가다 풀숲 속에서 장방형의 인공굴을 만났다. 자료를 뒤적거려 그것이 수인사 하수구임을 간파한다. 좀 더 오르니 주춧돌과 확독, 석축 등이 널려 있다. 이곳이 바로 성 안에 있었다는 수인사의 옛 터인 것이다. 이 깊은 성채의 안자락에서 울렸을 수인사의 범종 소리라니….
옛 기록에 수인사의 한자 이름은 '修仁寺', 혹은 '修因寺'로 나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수인산의 이름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뜻 유교적인 '仁'보다는 불교적인 '因'이 본래 이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좀 더 글자의 뜻에 무게를 실으면 '어질다, 만물을 낳다'라는 뜻이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 근본, 인연' 등의 차이가 아리송해 그만 물러서고 만다.
그보다는 수 백 년이 흘러 무너지고 흩어진 흔적 속에서도, 부역으로 돌을 쌓던 시간들이 선연해질 뿐이다. 수인산의 이름과 관련하여 산 아래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제주도를 비롯한 53개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쌓았기에 '쉰세골'이라 부르던 것이 '쉰골', '쉰산'으로 변하여 '수인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유래의 참 거짓을 이 때만큼은 가리지 않았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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