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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자산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철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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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에서 보성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전남 장흥군 장동면 소재지에서 바라보니 제암산 북쪽 줄기가 가깝다. 장흥쪽으로 20분 정도를 걸어가서 만난 감나무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원래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재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하는데 감나무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감나무 대신 소나무를 비롯한 침엽수가 우거진 숲을 따라 오르는 길에는 솔향이 그윽하다.
토요일인데다가 이 길은 종주코스라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덕분에 바람이 친구가 되고 새들이 길동무가 된다. 우리는 수십년을 만나온 사이처럼 금방 다정한 벗이 된다.
전망이 트이는 조그마한 바위를 만난다. 장흥군 장동면·장평면의 들판과 마을들이 평화롭게 내려다 보인다. 동쪽으로 보성 오봉산이, 북동쪽으로 순천 존제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의 키도 작아지고 철쭉 나무도 점점 많아진다. 물푸레나무에도 하얀 꽃이 피었다. 부드러운 육산인 제암산 아래로 펼쳐지는 신록은 청순하게 핀 수만 송이의 꽃이다. 연두빛 꽃으로 핀 신록이 싱그럽고, 내려쬐는 5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전망 좋은 바위를 두 번 만나 시원스런 주위 풍경을 즐기고 나자 작은산(689m)에 도착한다. 우람한 모습을 한 정상의 임금바위가 시야에 들어온다. 생김새가 ‘帝’자 모양이라 제암산(帝岩山)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본 제암산은 임금바위 뿐아니라 전체적인 산세도 우람하다. 여기에 신록으로 덮힌 제암산의 모습은 우람한 외형에, 청신한 치장을 하였다. 정상 뒤쪽에서 살짜기 고개를 내민 사자산의 모습도 반갑다.
정상 임금바위가 우람한 모습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햇볕을 받은 철쭉은 눈부시기까지하다. 화려하되 요란하지 않고, 요염하되 정숙함을 잃지 않은 철쭉을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에서 기쁨과 행복의 기운이 스며나온다.
정상 바로 앞에서 수십 미터의 천애절벽을 이룬 임금바위를 쳐다본다. 가까이서 보는 임금바위는 아슬아슬하다는 느낌만 들뿐 우람한 맛이 풍기지는 않는다. 임금바위를 겨우 기어올라가니 수십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을 만큼 평평하다.
시루봉·작은산으로 이어지는 북쪽능선과 곰재산·사자산으로 뻗어가는 남쪽능선이 마치 학의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뻗은 능선이 내 마음을 끌어 당긴다. 사자산에서 사자두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보고 있노라니 사자두봉은 이름 그대로 사자의 머리고, 사자산 봉우리는 사자의 꼬리 형상이다.
장흥의 진산(鎭山)인 제암산은 무등산에서 계속 남쪽으로 달려온 호남정맥을 이어받아 사자산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순천 조계산을 거쳐 광양 백운산까지 연결해 준다. 뿐만 아니라 제암산은 전남의 중앙에 위치하여 무등산을 비롯한 영암 월출산, 해남 두륜산, 고흥 천관산 등 전라남도의 웬만한 산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능선에 불쑥불쑥 솟은 천관산의 암봉이며 푸른 바다의 시원함이 대비를 이루며 내 가슴에 안긴다.
정상 근처의 붕긋붕긋 솟은 거대한 바위들이 부드러운 이미지의 제암산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제암단이라 부르는 이곳 정상에서는 예로부터 기우제를 지냈다. 요즘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산 아래 농민들이 올라와 젯상을 차려놓고 비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빌곤 한다.
임금바위를 내려와 곰재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정상 바로 아래는 키 작은 철쭉과 억새가 같이 자라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볼거리를 마련해준다.
진한 분홍색 철쭉 꽃송이들은 활활 타오른 불꽃이다. 수만 개의 불꽃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도 이미 하나의 불꽃이 된다. 철쭉꽃 뒤로 펼쳐지는 임금바위도 이미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타오르는 철쭉은 가끔 암릉을 만나 변화와 여백의 미(美)를 가미한다.
곰재산을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곰재로 내려선다. 장흥읍과 보성 웅치를 연결하는 고개로 장흥의 공설묘지 입구와 웅치 자연휴양림에서 가장 가깝게 올라올 수 있는 곳이다.
웅치(熊峙)라는 지명도 곰재에서 비롯되었다. 동학농민전쟁 때는 이 지역 최대의 격전지였던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이 곰재를 넘어 피난을 했고, 6·25때는 빨치산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제암산의 아름다운 철쭉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피어린 아픔이 서려 있다.
곰재에서 곰재산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키를 넘는 철쭉이 도열해 철쭉동산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곰재산(629m)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부터 펼쳐지는 철쭉동산이 나를 압도해 버린다. 자연이 만든 ‘천상공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공원에서는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무도회가 열리고 있다. 곰재산에 앉아 나는 요염하게 화장을 한 철쭉이 벌이는 ‘정열의 무희’를 감상한다.
어느덧 사자산과 사자두봉이 지척에 와 있다. 장흥읍내와 주위 들판이 정다웁고 강진만으로 흘러가는 탐진강이 자유롭게 다가온다.
지리산 바래봉 철쭉이 ‘인공의 철쭉공원’ 같은 이미지를 띠고 있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천연의 철쭉공원’이다. 이 속을 걷는 나는 훨훨 날아가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된다. 간간히 보이는 소나무의 짙푸른 잎도 이미 진홍색 철쭉에 동화되어 버렸다.
간재로 올라오는 사람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간재 바로 밑까지 임도가 나 있어 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땀흘리지 않고 간재로 올라와 곰재산까지의 철쭉동산을 구경하고는 다시 돌아가곤 하기 때문이다.
사자산(666m)에 오르자 남해바다의 푸른 물결이 싱그럽다. 주위의 빨간 철쭉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바다의 모습은 퍽이나 이채롭다. 보성만을 사이에 두고 고흥반도가 마치 섬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천관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오고, 억불산은 관산으로 통하는 18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뛰고 싶을 정도로 지척에 와 있다. 멀리 해남 두륜산이 희미하고, 강진의 만덕산·덕룡산이 선명하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던 산줄기는 사자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물론 호남정맥은 여기에서 동쪽 줄기를 타고 일림산(664m)으로 뻗어 나간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사자의 허리격인 평평한 능선을 걷는다. 발에 밟힐 듯이 키 작은 철쭉이 푸른 풀밭 위에 붉게 피어 곰재산 근처의 강열한 철쭉과는 달리 은은하고 잔잔한 감동을 가져다 준다. 여기에 남사면으로는 거칠게 형성된 암벽이 많고, 사자두봉 아래에는 너덜까지 넓게 자리잡아 이곳의 초지와 철쭉꽃은 더욱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사자두봉에 서서 제암산에서 곰재산, 사자산을 거쳐 이곳까지 붉은 빛을 띠며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본다. 이렇듯 작은산에서 시작하여 사자두봉까지 계속되는 철쭉꽃밭은 그 규모에 있어서 전국 어느 산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바로 아래에 와 있는 장흥읍내와 유유히 흘러가는 탐진강이 평화롭고 사랑스럽다. 장흥읍내가 이렇게 평화롭게 다가오는 것은 우람한 모습으로 지켜주고 있는 사자두봉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갑수 산행전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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