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사람과 풍경>
사람이 지켜내지 못하고 떠난 자리에 작은 생명들이 가냘픈 몸짓으로 서글픈 마지막 봄을 맞고 있는 탐진댐 수몰지구. 올 10월이면 697가구 2,200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고향’이 물속에 잠기게 된다. 나는 열다섯 살 때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살았다. 지난 88년부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해 주말이면 남녘 고향 장흥의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지난 96년에는 고향의 한 귀퉁이(유치면 일부)가 탐진댐 건설 추진으로 수몰 위기에 놓이면서 그간의 서울생활을 아예 정리하고 고향 마을로 가족 과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수몰 위기에 놓인 유치마을과 사람들, 그리고 유치의 모든 흔적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강가에 핀 한송이 꽃, 한숨을 쉬는 농투성이 노인네의 얼굴, 주인이 떠나 폐가가 된 빈집….
댐 건설은 마을사람들의 마음에도 상처를 줬다. 벼와 보리 농사만을 지었던 사람들이 보상금을 위해 국화와 장미, 미나리 등 특용작물 등을 심기 시작했다. 어차피 고향을 송두리째 내놓아야 할 운명. 농삿일을 놓고 도시의 자그마한 아파트라도 얻으려면 돈 한푼이 아쉽지 않은가. 보상을 놓고 사람들도 갈라졌다.
댐 공사가 끝나가고 있는 내 고향은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유치면은 예로부터 울창한 계곡과 맑은 물이 깊은 계곡을 타고 고요히 흐르는 청정지역이라 여름이면 깊은 계곡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유치면을 가로지르는 탐진강은 영암군 세류리에서 시작되어 장흥읍과 강진읍을 관통하여 강진만 구강포로 흐르는, 전국에서 가장 짧은 56㎞의 강이다. 탐진댐 수몰지역에서 약 1㎞ 상류에 위치한 가지산 보림사는 통일신라 때 보조국사가 세운 구산선문의 천년 종찰이다.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 한국의 가지산 보림사는 세계의 3대 보림사로 유명하다.
하지만 주민들은 한을 품고 살았다. 한국전쟁 때 보림사는 대웅전을 비롯한 20여 채의 건물이 불탔다. 외삼문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 국보로 지정된 3층석탑, 창성탑비 등만 병화를 면했다. 창성탑비와 동부도 서부도에는 한국전쟁 중의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얼마나 전쟁이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전쟁 전에는 남부군이 해방구를 만들어 군경과 대치했던 곳이다. 한국동란이 끝나면서 유치면에 남아 있는 건물은 유치면 늑용리 강성서원, 마을마다 겨우 한두 채 남은 가옥이 전부였다
“인공 때는 불바다가 되어 피란 다니기에 급급했는디, 인자는 물바다가 되야갔고 고향에서 쫓겨난당께.”
수몰을 앞두고 이사를 가던 유치면 단산마을 아재는 다시 짐을 싸야 하는 한을 토해냈다.
댐이 건설되면서 전국으로 흩어진 사람들은 그동안 좌우로 대립하며 살았던 말 못 할 상처를 토해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비디오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유치의 아픈 상처를 좀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고 고향의 참의미를 깨닫게 됐다.
요즘 한국수자원공사는 탐진댐 박물관을 만들고 댐 주변에 생태마을과 수변공원, 물 테마파크를 조성한다면서 댐 건설을 찬양하고 수자원공사를 홍보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좀더 체계적으로 수몰지역을 기록한 자료 모으기나 유치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탐진댐 박물관이 들어서기를 희망해보지만 아직 그런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장흥군 역시 탐진댐 수몰지역에서 발굴된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을 한곳에 모아 선사박물관을 짓는다고 하지만 예산이 뒤늦게 결정되었다며 기반조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을은 한 조각씩 사라져가고 있다. 포클레인이 헤집고 간 마을의 살림살이는 고물상들에 의해 모두 수거되어 어디론가 흘러갔다. 박물관이 조성되면 장흥군이나 수자원공사에서는 어딘가에서 비싼 돈을 들여 유치와 전혀 상관없는 민속품을 가져다놓고 유치를 말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치의 ‘역사’가 될 것이 뻔한 일.
98년이던가. 유치 수몰민들은 수몰지 내 마을앞 당산나무들을 옮겨 노거수 공원을 조성하자고 했다. 하지만 노거수를 개인이나 마을에 보상해주었고 전국에서 찾아온 조경업자와 목재상들이 보상받은 노거수를 사들여 목재로 잘라 가거나 전국의 골프장 등에 팔아버렸다. 그런데도 댐이 완공되는 요즘에서야 비로소 역사박물관을 짓겠다며 마을의 역사를 뒤지고 있다.
10월이면 유치면 댐 수몰지역은 송두리째 물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마지막 봄을 서럽게 맞고 있는 수몰지를 보면서 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잊혀져간 이름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젠 강물도 흐름을 멈출 텐데…. 올해는 강섶의 봄꽃이 서럽게 아름답다.
경향신문 2004-04-20 16/ 마동욱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