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기내시(寄內詩)의 맥락에서 본 백광훈의 「용강사(龍江詞)」(상)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목차」
1. 머리말
2. 「용강사」의 독법
3. 「용강사」의 창작 시기와 주변 정황
4. 맺음말
[국문요약]
백광훈의 「용강사」는 그동안 남성들의 이기적인 태도로 인해 버림받은 여성이 남편을 향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로 이해되어왔다. 당시 유행한 민요풍 한시의 맥락에서 관습적으로 읽은 결과다. 한시는 관습성이 강한 보수적인 장르지만, 「용강사」의 경우처럼 관습성의 코드로만 읽을 때 심각한 오독으로 이어질 염려가 있는 작품도 있다. 「용강사」는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기내시(寄內詩: 객지의 남편이 고향의 아내에게 보내는 시)의 성격을 띠는 작품이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의 토로가 시인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핵심 주제다. 용강(龍江)은 자신의 고향 앞으로 흐르는 용호(龍湖)를 우의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표현 방식은 중국의 악부(樂府)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내용은 관습적 주제를 반복하지 않고 자신의 실제 삶을 녹여냈다. 백광훈의 작품 속에는 객지에서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가족애를 토로한 시들이 적지 않다. 백광훈은 조선 중기 시단을 이끈 뛰어난 시인이다. 낭만적인 시풍을 추구하여 서정적 가락에서 아주 우수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그의 문학 속에는 남도(南道)의 애틋한 정서와 리듬이 살아 있다.
1. 머리말
寄內, 혹은 贈內詩란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시다. 귀양지나 객지에서 고향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것이 많고, 때로는 함께 살며 평생 고생만 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은 것도 있다. 唐詩에는 李商隱의 「夜雨寄內」를 비롯하여, 白居易의 「贈內」와 같은 작품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우리 역대 문집 속에도 기내, 혹은 증내시는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이 글은 백광훈의 「龍江詞」를 寄內詩의 맥락에서 살펴보고, 객지에서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지은 그의 작품들을 함께 읽음으로써, 그의 시에 나타난 가족애의 정서를 아울러 검토키로 하겠다. 백광훈은 조선 중기 학당풍을 선도했던 삼당시인의 한 사람이다. 낭만적 당시풍을 배워 서정적 가락에서 빼어난 성취를 보여준 그의 한시에는 보기 드물게 南道唱의 애틋한 情恨과 구성진 가락이 절절이 배어 있다.
한시에서 여성정감의 표출은, 특히 창작 주체가 남성일 때 관습성을 띠는 것이 일반이다. 많은 경우 고악부풍의 버림받음, 기다림, 그리움을 주조로 하는 관념적 주제의 복제로 나타난다. 이때 시 속의 여성은 실존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낭만성을 제고키 위한 문학적 장치거나, 시인 자신의 정서를 가탁·여과 또는 교훈적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편적 성격을 띤다. 따라서 시적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여 남녀의 애정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여성의 삶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그리고 있는 경우에도, 그 형상은 구체적 실재로 다가오지 않고 다분히 관념화된다.
조선 후기로 이행하면서 여성의 실존적 삶은 시인의 붓끝에서 비로소 핍진한 형상을 얻는다. 하지만 조선 전기 한시의 목소리는 採蓮曲·宮詞 風의 낭만적 사랑 노래 아니면, 관념화된 妾薄命·征婦怨 類의 棄婦 모티프의 되풀이일 뿐이다. 이들 시 속의 여성들은 중국 고대의 여성으로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시공이 진공화되어 있다. 상황 또한 개연성에 입각한 관습적 설정일 뿐이어서, 거기서 특정 개인의 구체적 정황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16,7세기에 성행한 학당풍은 중국 악부시의 擬作을 더욱더 부추겼다. 이는 갈수록 도를 더해 나중에는 김창흡의 비판대로 심하게는 百家一套, 千篇一律의 모방 복제로 치닫고 만다. 하지만, 학당풍의 출발점에 서있는 삼당시인의 시에서도 단순히 중국 악부시풍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당대 인물과 사실에 입각한 자기화 과정의 추구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 정민, 「16,17세기 학당풍에서 낭만성의 문제」,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태학사, 1999) 66면에서 이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 좋은 예의 하나가 이 글에서 읽으려고 하는 백광훈의 「龍江詞」다.
2. 「용강사」의 독법
「용강사」는 앞선 여러 연구자들이 거론한 바 있다. 임형택은 "봉건적 질곡 속에서 고달픈 여성의 처지를, 한 여자가 자기 신세를 술회하는 형식으로 엮은 것"이라 하고, 벼슬자리에 연연한 나머지 처자식을 불고하는 남편을 탓하는 뜻을 담은 작품으로 읽었다. 나아가 "봉건사회 여성들은 남자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처지에, 남성들의 출세주의적 생활태도 및 인간애의 망각으로 인해서 삶이 무한히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짚어냈다. <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 하, 116면(창작과비평사, 1992) 참조.>
이혜순은 "백광훈의 「용강사」도 「첩박명」과 마찬가지로 여성화자가 버려진 자신의 신세를 독백체로 자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처자를 외면하고 벼슬에 집착하는 남편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었다. 또한 님에 대한 여성화자의 비판의식이 대사회적인 것으로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고 보아, 남성작가와 남성으로 이루어진 독자의 일치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해했다.< 이혜순, 「여성화자 시의 한시 전통」, 『한국한문학연구』 학회창립20주년 기념특집호(한국한문학회, 1996), 27면.>
박영민에게서도 이러한 시각은 지속된다. 연구자는 이 작품에서 자식을 방치하는 무정한 부정, 가족을 저버리는 무책임한 가장에 대한 원망을 읽는다. 남편은 "'집을 떠남으로써 가족을 비극에 빠뜨리는 자"'이고, 그는 금은보화나 부귀를 바라고 부질없는 헛된 꿈을 쫓아 가족도 버리는 가여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 박영민, 「사대부 한시에 나타난 여성정감의 사적전개와 미적특질」(고려대 박사논문, 1998), 83-86면 참조.>
대개 이러한 관점은 논자마다 조금씩 다른 맥락에서 나온 것이긴 해도 대체로 「용강사」를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점은 일치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여성의 삶이 남성들의 출세주의적 생활태도 및 인간애의 망각으로 인해 무한히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또 작품 속에 그려진 여성의 목소리를, 버려진 자신의 신세에 대한 독백체의 자탄으로 읽거나, 여성화자의 비판의식이 대사회적인 것으로 확대되지 않았다고 본 것은 어느 일면에서 타당한 지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용강사」를 부귀권세에 대한 부질없는 헛된 꿈을 쫓아 가족을 비극에 빠뜨리는 무책임한 가장의 출세주의적 생활태도를 여성의 시각에서 제시한 작품으로 읽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버려진 자신의 신세에 대한 독백체의 자탄에 비중을 두어 읽는 것이 적절한가? 다른 방식의 읽기는 없을까? 뒤집어 읽으면 어떻게 읽히는가? 이 글은 이런 단순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백광훈의 한시 중에는 「西樓篇」「西臺篇」「東郭美人篇」 같이 전형적인 樂府題의 문법에 충실한 작품으로 버림받고 기다림에 지친 여인의 처지를 관습적으로 노래한 작품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용강사」는 이들 작품과 다르다는 것이 논자의 판단이다. 먼저 작품을 본다.
저는요 용강 어귀 살고 있는데
날마다 문 앞에는 강물 흘러요.
강물이 흘러 흘러 쉬임이 없듯
님 그리는 제 마음도 끊임없지요.
9월이라 강변엔 무서리 찬데
갈대꽃 희게 피고 단풍잎 붉네.
줄지어 기러기는 북에서 와도
서울 계신 님에게선 편지가 없네.
누에 올라 달 보시며 괴로우시리
이 내 몸 강 위 산에 오르게 하네.
가실 제 뱃속에 있던 아이가
이제는 말도 하고 죽마 타고 다니누나.
다른 아이 따라 배워 아버지라 부르지만
만리 밖 네 아버지 그 소리 어이 듣나.
인생의 궁달은 하늘에 달렸는데
슬프다 괴로이 헛된 세월 보내네.
베틀에 비단 짜 겨울 옷 지을만 하고
강 위 몇 뙈기 밭 추수할 수 있지요.
집에서 마주할 젠 가난해도 기뻤거니
금은을 두른대도 귀하다 할 것 없네.
아침에 까치가 뜰 앞 나무 우짖길래
문 나서 강가 길을 자주 바라보았지.
곁의 사람에게도 마음 속 일 말 못하고
내 낀 물결 애를 끊다 날이 또 저무누나.
붉은 굴레 금 고삐 한 어느 곳 낭군인지
말이 힝힝 울더니만 서쪽 집에 드는구나.
妾家住在龍江頭 日日門前江水流
江水東流不曾歇 妾心憶君何日休
江邊九月霜露寒 岸葦花白楓葉丹
行行新雁自北來 君在京河書未廻
秦樓望月幾苦顔 使妾長登江上山
去時在腹兒未生 卽今解語騎竹行
便從人兒學呼爺 汝爺萬里那聞聲
人生窮達各在天 可惜辛勤虛度年
機中織帛寒可衣 江上仍收數頃田
在家相對貧亦喜 銀黃繞身不足貴
朝來鵲 庭前樹 出門頻望江西路
不向傍人道心事 腸斷烟波日又暮
紅羈金絡何處郞 馬嘶却入西家去
7언 26구에 달하는 긴 시다. 처음 네 구에는 용강 어귀에 사는 여인이 집 앞을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임을 향한 그칠 뉘 없는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어지는 5구에서 10구까지는 9월, 가을의 끝자락에서 추운 겨울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아무 소식없는 임에 대한 막막한 기다림을 노래한다. 秋收冬藏, 남들은 가을걷이를 끝내고 겨울의 안온한 휴식으로 들어가는데, 정작 그녀는 임의 소식도 몰라 애를 태운다. 임도 고향을 그려 누각에 올라 저 달을 보시며 괴로워 하시겠지. 이런 생각에 그녀는 임이 바라보고 계실 그 달을 마주 보려 강 위 산으로 올라가곤 한다.
다시 17구에서 20구까지가 이어진다. 길쌈하여 옷 짓고, 밭 갈아 밥 먹어도 함께 있을 땐 기쁘기만 했는데, 이제 멀리 헤어져 있자니 금은을 몸에 두른대도 하나도 기쁘지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벼슬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어서 빨리 돌아오기만 해달라는 간청이다.
21구에서 26구로 마무리했다. 까치 울음소리에서 그녀는 임이 돌아오실 희망을 읽었다. 두근대며 혼자 끙끙 앓다가 또 하루가 그렇게 하릴없이 저문다. 저 멀리 근사한 차림으로 말 위에 걸터앉은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저만치서 길을 꺾어 다른 집으로 들어가버리고 만다.
이 시의 문학적 우수성은 그 형상화의 솜씨에 있다. 집 앞을 쉼 없이 흘러가는 용강의 물과 임 그리는 자신의 마음을 한데 잇대어 놓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바로 9월의 霜露와 흰 갈대, 붉은 단풍의 색채를 앞세워 "書未廻'의 안타까움으로 내달았다. 다시 '秦樓望月'로 서울 계신 임 또한 가족을 그려 '苦顔'을 가누지 못할 것이기에, 이 생각이 자신으로 하여금 '江上山'을 늘 오르게 한다고 해서, 임에 대한 원망에 앞서 애틋함을 실었다.
< 이 구절의 해석에서 임형택은 "다락 마루 올라서 둥근 달 바라보며 얼굴 찌푸리기 몇몇 번이었던고? 이내 몸 언제까지 언제까지 강가 산마루 올라가야 하나요?"로 옮겼고, 박영민은 "다락마루에서 달을 바라보며 몇번이나 얼굴을 일그러뜨렸던가? 첩으로 하여금 길이 강가 산에 오르게 할건가요"로 옮겼다. 9구 " '多苦顔" 의 주체를 아내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이백 「關山月」의 9,10구 "戌客望邊色, 思歸多苦顔"에서 따왔다. " 秦樓望月"의 주체는 서울의 남편이다. 남편의 "幾苦顔"을 떠올려 그녀는 자꾸만 그 달을 보려고 "江上山"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이렇게 보아야 호응이 온전해지고, 무엇보다 '使妾'의 '使'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일반적으로 '秦樓'는 여성적 공간을 가리키므로 주체를 여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진루가 여성적 공간이기는 해도 일반적으로 妓院의 뜻으로 쓰였지 규방의 뜻으로 쓰인 예가 없다. 또 '秦'에는 '서울'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주체는 남편이 되어야 마땅하다. >
시상의 전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고저완급이 절로 절주를 이루었다.
11구에서 14구까지는 앞서 고조된 감정을 한번 추슬러 원망을 토로하는 대신, 아버지를 한번도 못본 채 어느덧 아버지란 말을 배울만큼 자란 어린 자식 이야기로 방향을 돌렸다. 이른바 聲東擊西의 수법이다. 그리고 나서 15,6구에서는 窮達在天임을 알면서도 '辛勤虛度'하는 남편을 향한 원망을 비췄다. 17구 이하에서는 다시 정을 거두어 경으로 추스렸다. 까치 울음에 두근대며 기다린 하루가 보람없이 저무는 것을 이웃으로 드는 '紅羈金絡'에다 슬쩍 가탁하였다.
읽고 나면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애절한 심사가 잡힐 듯 그려진다.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녀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읽자면 작품의 주제를 부귀권세의 헛된 꿈을 쫓아 가족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남편에 대한 원망과, 버려진 자기 신세에 대한 자탄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怨望 보다는 재회에 대한 願望이, 자탄에 앞서 남편에 대한 안타까운 기다림의 정서가 더 강하게 묻어난다.
그녀에게 서울 계신 임은 무정하고 무책임한 가장이 아니다. 비록 편지는 없어도, 그녀는 남편이 서울에서 달 보며 가족을 그려 괴로워 할 것을 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애쓰는 남편을 동정하고 연민한다. 가난해도 기뻤던 지난 날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이 기다림 속에 저물어도 재회의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앞에서 「용강사」에 대해 비슷한 시각을 견지한 것은 시인의 상황 문맥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고, 관념적 여성화자시의 맥락으로 읽은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 이에 반해 최낙원은 「옥봉 백광훈의 한시 연구」(단국대 석사논문, 1986), 38면에서 "이 작품이 비록 작자가 여인의 입장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라지만, 다분히 작자 자신의 자전적인 면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고달픈 객지의 생활에서도 그 자신이 항상 고향에 있는 처자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을 바탕으로 그는 고향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을 묘출해냈던 것"이라고 적절히 지적한 바 있다. 김종서도 「옥봉 백광훈 시 연구」(연세대 석사논문, 1994), 108면에서 같은 취지의 언급을 남겼다.>
사실 평범하게만 본다면 이런 독법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백광훈의 「용강사」는 좀더 섬세한 고려가 요구되는 작품이다. 시인 개인의 눈물겨운 가족사와 젊은 날의 갈등이 그 갈피에 서려있는 까닭이다.
우선 제목부터 문제다. '용강사'는 현대어로 옮기면 '용강의 노래' 쯤 된다. 용강은 실재하는 구체적 지명이다. 또 시에서 제시한 상황은 당나라이거나 송나라이거나, 아니면 중국이거나 조선이거나 아무래도 관계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점에서 「용강사」는 「첩박명」류의 관습적 악부체시와는 다르다.
용강은 어디인가? 용강은 龍湖 또는 汭陽江으로 불리는 전라도 장흥 땅을 흐르는 탐진강의 지류다. 실제 백광훈의 고향집 앞을 흘러가던 강물이다. 백광훈의 『옥봉집』속에는 龍湖와 汭陽江을 노래한 한시가 많다. 지금도 장흥의 富春亭 아래 물가 바위에는 백광훈이 초서로 쓴 '龍湖' 두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이 용호가 바로 용강이다.
<『文林고을 長興』(장흥문화원, 1999), 30면에 관련 내용이 있고, 이밖에 『長興의 亭· ·臺』(장흥문화원, 1998)에는 관련 시문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아내가 살고 있던 곳은 장흥의 용호가 아니라 해남군 옥천면 원경산 아래였다. 그러므로 용강이 바로 용호라 하더라도 아내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두 곳의 거리는 불과 몇 십리 떨어져 있지 않고, 용호가 그에게 고향을 환기시키는 어휘임을 떠올리면 작품 속의 설정을 크게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직접 용호라 하지 않고 용강이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이 시가 풍기는 악부풍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용호라 하여 고향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임을 명백히 할 경우 시의 함축은 약해지고 시는 금세 시인 자신의 신세 타령으로 전락하고 만다. 용강이라 하면 공간 배경은 구체적 구상성보다는 추상성을 띠게 되어 시의 행간을 그만큼 더 넓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는 몰취미하게 용호를 직접 문면에 드러내는 대신, 용강이라 하여 기실은 용호를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 시는 백광훈이 과거를 준비하며 서울에 머물던 시기에 지은 작품이다.
시속의 여인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다. 그는 당시 출세에 눈이 멀어 고향의 아내를 버리고 서울 생활의 도락에 빠져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가세를 일으켜 보려고, 생계의 도리를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허구헌 날 고향 생각만 하며, 재회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아니 그는 일생을 따라 다닌 곤궁 속에서 서울 생활의 도락에 빠질 겨를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요컨대 「용강사」는 고향에서 마냥 자신이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심경을 자신의 입장에서 헤아려 본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고향의 아내이지만 발화자는 시인 자신이다. 이런 특수성을 감안하고 시를 다시 읽으면 이 시의 독법은 그저 관념적 여성화자로 읽을 때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14구 '汝爺萬里那聞聲'의 원망은 애비 노릇도 못하는 자신을 향한 자책이 되고, 16구 '可惜辛勤虛度年'의 탄식은 이룬 것 없이 계속 머물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낭패감을 스스로 못 견딘 토로가 된다. 집에서는 가난해도 기뻤다는 말은 기실 아내의 말이기 보다 외롭고 고단한 객지 생활에 지친 시인 자신의 독백이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얼굴도 못 본 자식 생각, 앞길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서울 생활, 살길이 막막한 생계와 무능력한 家長의 슬픔, 이런 착잡한 심경들이 시의 구절구절 마다 절절이 배여 있다.
「용강사」는 아내의 입장에서 출세에 눈이 멀어 가족을 비극에 빠뜨린 출세지상주의적 가장의 행태를 제시한 작품으로 읽을 수는 없다고 본다. 버려진 자신의 신세에 대한 독백체의 자탄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 아내는 이런 심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부족한 남편의 못난 가장 구실을 절절히 고백한 노래로 봄이 사실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이 시의 주제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가 아니라, '여보! 미안하오'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