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봉 백광훈 서실

조선 16세기 임안로, 허황 등이 중종의 문정왕후를 폐하려다 실패하여 폐사되거나 귀양을 가게 된 어지러운 시절, 문학인들은 이런 사회풍조에 맞춰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걸머지고 팔도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어지러운 세상과 나라의 앞일을 문장으로 토해내는 유랑문학을 태동시켰다.

그 대표적인 시인 중 한사람이 옥봉 백광훈이다. 그의 맏형인 광홍(光弘)은 관서별곡의 저자로 유명하고 둘째 광안(光顔), 사촌 광성(光城)이 모두 특출해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 사촌 광성이라 불렀다.

옥봉은 1537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출생으로 조상들의 높은 학문적 업적과 가풍을 이어받아 평생을 방랑시인으로 유랑하여 저항의식을 화선지에 토해냈다. 13세 나이로 문장가들에게 사사받았고 27세 때에야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를 봐 진사가 되지만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고 야인의 길을 걸었다.

비범함을 높이 인정받았던 옥봉은 여러 차례 추천을 받아 관직이 내려지자 41세 때 선릉참봉을 제수받아 나아갔고 44세 때 박순의 후원에 힘입어 예빈사참봉겸 감조감으로 일했다. 옥봉이 남긴 대표 문집인 옥봉집에는 모두 5백 4수의 시가 실렸는데 애틋한 향수와 자연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관조미가 넘치고 있다.

봄산의 고사리만 보아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것을 어찌 하리오 할 정도로 애수를 남긴 옥봉은 일찍 모친을 여의고(9세) 첫 아내를 젊어서(27세) 사별한데다 빈한한 가세 속에서 병약한 아내와 형제의 우애를 염려하던 인간적 배경이 그의 시에 짙게 깔려있다.

글공부를 위해 옥천면 대산마을로 들어와 후에 차남인 진남에게 지금의 터로 나가 살것을 명해 아버지의 유업을 송산리로 모셔와 정착했다. 현재 옥봉은 유품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돼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유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지난 81년에 지어진 사당도 여기있다. 옥천면 송산리 옥봉서실에는 옥봉 사당과 함께 그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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