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칼럼니스트 양영훈의 문화유적기행
주간동아/1998.04.23(130호)/양영훈
보 림사(寶林寺)는 전남 장흥땅 북쪽의 가지 산 자락에 들어앉은 천년고찰. 탐진강의 실 개천 같은 물길을 얼마쯤 거슬러오른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야트막한 황토밭 아니면 너른 들녘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 남도의 여 느 곳들과 달리 하늘만 빼꼼하게 열린 첩첩 산중이다.
보림사는 신라 경덕왕18년(759)에 창건됐다. 신실한 화엄종 승려였던 원표대덕이 당나라 와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귀국한 후 이곳에 가지산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화엄종 사찰이었지만 뒤에 선 종의 대가람으로 변모했다. 헌안왕4년(860)에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맨 처음으로 가지산문을 이곳에 개산 한 것이다.
보림사는 곡성 태안사, 화순 쌍봉사와 더불 어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큰 사찰로 꼽히며 오랫동안 웅장한 사세를 유지해 왔다. 그러 나 6·25전쟁을 겪으며 폐사될 지경에 이르 렀고, 1948년 여순사건 이후 가지산은 영광 불갑산, 광양 백운산, 구례 지리산 등과 함께 좌익 야산대(野山隊)의 거점이 됐다.
1950년 가을, 전남지역 야산대와 인민군 유격대가 보림사에 집결해 겨울을 났다. 이듬해 봄에 이곳으로 밀고들어온 군경합동토벌대는 이 절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토벌 대의 공세에 밀린 유격대와 야산대가 퇴각하 면서 불태웠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당시 보림사에서 화마를 피한 것은 일주문과 천왕문뿐이었고,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을 비롯해 20여동의 건물이 모두 잿더 미로 변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철조비로 자나불좌상, 삼층석탑과 석등, 보조선사 부도 와 부도비, 동부도와 서부도 등의 국보급 문 화재들은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최 근에 들어서 대적광전 대웅전 요사채 종루 담장 등이 복원됨으로써 선종 대가람으로서 의 옛 모습이 점차 되살아나고 있다.
현재 보림사에 남은 문화재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보조선사 생전에 제작된 철조비로 자나불좌상. 높이 2.74m의 이 불상은 좌대와 광배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덩그러니 남 았지만 신라 하대의 철불을 대표하는 수작으 로 꼽힌다.
흙으로 만든 나발(螺髮·꼬불꼬 불한 나선형으로 말린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덧붙인 탓에 머리가 몸집에 비해 크고 얼굴 은 긴 편이나 눈썹에서 콧날로 이어지는 선 과 가늘게 뜬 눈의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시 원한 느낌을 준다. 콧잔등은 편편하고 인중 은 두드러진 사다리꼴이며, 입은 작은 편이 나 귀는 어깨에 닿을 만큼 길다. 이상미(理想美)를 추구한 전 시대의 불상과는 달리 긴 장감과 탄력성은 크게 줄었지만 당당하고 건 장한 얼굴표정과 몸에서는 당대의 현실을 반 영한 듯한 힘이 느껴진다. 이 불상의 왼쪽 어깨에는 우리나라의 불상 가운데 유일하게 조성 내력이 담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보림사 삼층석탑은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조 성된지 10여년 뒤에 세워진 것으로, 석등 하 나를 사이에 두고 대적광전 앞에 나란히 서 있다. 이 두 탑과 석등은 상륜부(相輪部)를 포함한 부재를 거의 온전하게 갖추고 있는 데, 현존하는 통일신라의 석탑과 석등 가운 데 원래의 형태를 제대로 갖춘 경우는 매우 드물다. 두 탑은 5.9m와 5.4m로 높이가 약간 다르지만 구조는 거의 똑같다.
그런데 이 탑의 형태와 구조에는 9세기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신라 석탑의 특징이 잘 드 러나 있다. 즉 이전의 석탑에 비해 전체 규 모가 매우 작아지고, 얇아진 지붕돌의 네 귀 퉁이는 심하게 들려져 있어 장중한 맛이 없 고 섬약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단아하고도 균형 잡힌 모습에서는 신라 석탑의 세련된 조형미를 엿볼 수 있다.
1934년 두 탑의 사리공(舍利孔·부처나 고승 의 사리를 안치한 구멍)에서는 탑의 건립 년 대를 적은 탑지(塔誌)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탑지에는 신라 경문왕10년(870)에 서원부(지 금의 청주)의 소윤이던 김수종이 왕명을 받 들어 선왕인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두 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건립 연대도 확실한데다가 원형을 거의 완벽하 게 간직한 보림사 삼층석탑은 오늘날 다른 석탑들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된다. 선종의 중심 도량이던 보림사의 경내와 주변 에는 선승들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가 여럿 있다. 보물로 지정된 부도만도 모두 3기인데, 그 중에서도 대웅전 뒤편의 산비탈에 있는 보조선사의 부도가 가장 빼어나다.
높이가 4.1m에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인 이 부도는 보조선사가 입적한지 4년후인 한 강왕10년(884)에 부도비와 함께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몸돌을 지탱하는 기단부가 심 하게 훼손되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몸돌은 유난히 크고 넓은 편이며, 몸돌 앞뒤에 조각된 문비(門扉·문)의 양쪽에는 옷주름과 매듭까지 매우 섬세하게 표현된 사 천왕상이 양각되어 있다.
조각이 섬세한 몸돌과 달리 지붕돌은 매우 무뚝뚝하게 생겼 다. 이 부도는 일제 때 도굴꾼들에 의해 심 하게 훼손되기는 했지만, 본래의 장대한 멋 은 여전하거니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신 라 석공의 여문 손끝과 깊은 신심이 고스란 히 전해져온다.
양영훈〈여행칼럼니스트〉
■기타 가볼만한 곳: 비자나무숲과 제암산
울창한 비자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보림사 경 내 한복판에서 솟는 약수는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물맛 좋기로 소문났다. 보림사 인근의 주민들에 따르면, 다 죽어가 는 물고기를 이 물에 던져 놓았더니 금방 기 력을 회복해 물 속을 마구 휘젓고 다녔을 정 도로 약효가 탁월하다고 한다.
장흥읍과 보성군 웅치면의 경계를 이루는 제 암산(778m)과 사자산(666m)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무리지어 핀 철쭉꽃을 볼 수 있는 곳. 대체로 철쭉이 만개하는 4월말∼5월초 사이에 철쭉제가 열리기도 한다. 제암산과 사자산을 잇는 십리 능선길이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새빨갛다. 능선에서 바라다보이 는 다도해의 장엄한 경관도 인상적이다.
보림사 입구에는 보림관광온천모텔 (0665-62-1991), 보림산장(0665-62-1993) 등 식당을 겸한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장흥읍 군청 앞에 위치한 녹원식당(0665-63-8900)은 저렴하고 푸짐한 남도의 한정식을 맛볼 수 있는 집.
맛깔스런 나물과 젓갈뿐 아니라 싱 싱한 생선과 해산물이 한상 가득히 차려져 나온다. 장흡읍내의 천록식당(0665-63-4323) 은 소문난 궁중전골 전문점.
■용어설명
▲구산선문: 통일신라 때 지방 호족들의 후원 아래 새롭 게 문을 연 선종 불교의 9개 문파(門派). 가 지산문(장흥 보림사) 실상산문(남원 실상사) 사굴산문(강릉 굴산사) 동리산문(곡성 태안 사) 성주산문(보령 성주사) 사자산문(영월 법 흥사) 희양산문(문경 봉암사) 봉림산문(창원 봉림사) 수미산문(해주 광조사)이 그것이다.
당시 도당(渡唐) 유학승들은 「不立文字 直指人心」, 즉 「문자(경전)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각자가 자기의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의 가르침에 크게 매료됐는 데, 이는 교리와 권위를 중시해온 신라 귀족 불교의 틀에서 크게 벗어난 혁신 사상이었 다.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선사들로부터 깨달음 을 인정받은 유학승 중에서 가장 먼저 돌아 와 선법을 전한 이는 도의선사였다. 설악산 진전사에 주석하던 도의는 염거화상에게, 염 거화상은 다시 보조선사 체징에게 선법을 전 했다.
▲상륜부: 탑의 꼭대기를 이루는 부분. 아래쪽부터 앙 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가 차례대로 쌓 여 상륜부를 이루는데, 상륜부의 여러 부재 를 지탱하는 것은 중심 기둥인 찰주다. 찰주 는 흔히 청동이나 쇠로 제작되기 때문에 오 랜 세월이 흐르면서 부식되기 일쑤다. 그래 서 현존하는 대부분의 석탑들에는 상륜부가 없으나 보림사 삼층석탑은 돌로 찰주를 만든 덕택에 오늘날까지 상륜부가 온전할 수가 있 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