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교육연구소 연구원 정 오 삼

영암군 금정면에서 덤재라 불리는 힘겨운 고개를 하나 넘으면 장흥군 유치면이 나옵니다. 해방 후 빨치산으로 유명했던 오지이지요. 장흥 땅에는 고인돌 떼무덤이 곳곳에 널려 있어 먼 옛날부터 사람이 살만한 고장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걸로는 백제 때 오차현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처음이며 남국신라 때에는 오아현이라 하였고 보성군에 속했었지요. 고려 초에는 정안현으로 이름을 고쳐 북쪽의 영암군에 속했다가 고려 인종 때, 인종의 왕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 이곳 관산면 방촌리였던 까닭으로 오늘날과 같은 장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당시에는 부로 되었다가 고려 원종 6년(1265)에 들어서는 한때 회주목으로 승격되기도 했었습니다. 그 후 장흥부를 줄곧 유지하면서 주변의 강진, 보성, 고흥 등 남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의 침략을 막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태종 13년(1413)에는 장흥도호부로 되었고 세조 때는 진이 설치되었지요. 조선 말기인 고종 32년(1895)에 장흥군이 된 후 몇 차례의 행정구역의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릅니다.

장흥에는 산지가 넓게 분포되어 있고 제법 규모 있는 산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산과 계곡과 맑은 물이 어우러지는 경승을 곳곳에서 즐길 수 있답니다. 또 보림사를 품에 안고 있는 가지산과 국사봉에서 시작하여 장흥읍을 거쳐 강진만으로 들어가는 탐진강의 여러 물줄기들 덕분에 제법 넓은 들을 곳곳에 지니고 있어 어업보다는 농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탐진강에는 갑오농민전쟁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장흥싸움 이야기가 함께 흘러갑니다. 농민군 최후의 싸움이 장흥읍 남외리의 석대들에서 벌어졌고, 이때에 관산대장, 또는 남도장군으로 불리던 이 지역 출신 지도자 이방언과 함께 수많은 농민군들이 탐진강에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보림사(寶林寺)

장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보림사이지요. 물론 천관산과 장천재도 빼놓을 수는 없지만 이번 답사는 보림사에서 접어야 하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장흥의 고인돌들과 가사문학의 백광홍선생, 존재 위백규선생의 유적들, 그리고 천관산의 천관사에도 오를 기회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표고버섯으로 유명한 장흥군 유치면의 가지산(505.8m) 자락에는 남쪽바다를 향하여 보림사가 그림처럼 앉아 있습니다. 달마의 선법(禪法)을 전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남국신라 헌안왕 때 세운 보림사는 우리나라 9산선문 종찰 중의 하나입니다. 더구나 고려 말에 들어 태고화상(太古和尙)이 공민왕 5년(1356)에 9산선문을 통합하는 등, 크게 선풍을 떨쳤던 곳이지요. 본래는 그 이전에 원표율사가 세운 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순천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한 보림사는 인도 가지산 보림사, 중국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었습니다.

보림사는 이 땅에 맨 처음 선법을 전한 도의선사로부터 이어지는 법통을 지니고 있으며 염거화상에 이어 보조선사(804-880)를 세 번째 조사로 삼아 가지산문의 중심도량이 되었습니다. 그런 탓으로 고려 말까지 이름을 떨친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곳이지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이곳 가지산문에 속하는 스님이었다고 합니다. 화순 쌍봉사, 곡성 태안사와 함께 이 지역에서 선종본산으로 천년이 넘는 세월을 유지하던 보림사는 1951년 대부분의 절집이 불에 타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1950년 가을부터 전남지역의 빨치산이 이곳에 모여 있었던 관계로 군경토벌대와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면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일주문과 천왕문을 제외하고 모든 건물이 불타버린 것이지요. 다행히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그리고 보물인 동부도, 서부도, 보조선사 창성탑, 보조선사 창성탑비 등 우수한 석조문화재와 관련 문헌자료 등은 피해를 면해 보존되고 있습니다.

보림사의 창건설화들을 살펴보면 보림사가 터를 잡은 곳이 못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산을 깍아 절터를 만드는 것 보다 못을 메워 만드는 것이 훨씬 쉬웠기 때문일 것이며, 그래서 당시에 세워졌던 큰 절집들이 대부분 못을 메워 터를 만들었지요. 또 용들에 얽힌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마 새로 들어온 불교가 고유신앙과 대립하여 이를 물리치고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원표율사에 얽힌 설화에도 못과 용이 등장하며 보조선사의 경우는 아주 구체적으로 못을 메우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보조선사가 절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이곳에서 좋은 절터를 발견하였으나 하필, 그 자리에 큰못이 있고 뱀, 이무기, 용이 살고 있어 접근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는 궁리 끝에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후, 이 못에 흙과 숯을 가져다 넣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러자 눈병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흙짐과 숯짐을 지고 이곳을 찾게 되고 드디어는 못이 메워지고 말았지요. 물론 마지막까지 안 나가려고 버티는 청룡과 백룡은 보조선사가 지팡이로 쫓아내었습니다. 쫓겨난 두 용은 서로 하늘에 오르려고 다투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패어 용소가 생겼고 청룡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죽었습니다. 보림사 남쪽에 있는 피재가 바로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곳이고, 장평면 청룡리는 청룡이 죽은 곳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부근에 용두산, 용문리, 용소, 늑룡리 등과 같이 용과 관련된 땅 이름이 많습니다.

보림사는 가지산 맑은 물이 이루어 내는 수려한 계곡을 따라 제법 안쪽으로 접어 들어가야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담하고 단정한 일주문을 지나면 곧 부도밭을 만나는데 이곳의 동부도와 서부도를 먼저 살피고 가는 것이 좋지요. 보림사 동부도(보물 제155호)는 보림사 입구의 동쪽 숲속에 다른 부도들과 함께 부도밭을 이루고 있는데 이 부도가 그중 워낙 준수하여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남국신라 부도의 전형인 팔각원당형을 따르고 있는 이 부도가 누구의 부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맑고 깨끗한 화강암을 잘 다듬어 극락세계를 표현해내고 있으며 새김솜씨도 뛰어나지요. 바닥돌은 팔각으로 넓게 땅을 덮고 있으며 하대석의 옆면에는 안상이 세련되게 새겨져 있고 윗면은 덮고 있는 여덟 장의 연꽃잎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귀꽃을 살짝 드러내 보여줍니다. 중대석은 가늘고 낮은 팔각의 기둥으로 무늬는 새겨놓지 않았습니다. 대석의 위 부분은 받치는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는데 단정하고 깔끔한 새김솜씨를 보여줍니다. 이 상대석 위에 살짝 도드라지게 2단의 받침을 만들고 팔각의 몸돌을 올려놓았지요. 이 몸돌에는 낮은 돋을새김으로 문의 모양과 열쇠고리를 표현하였습니다.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지붕을 본떠 만들었는데 약간 얇다는 느낌을 주며 우동마루를 뚜렷하게 나타냈지요. 또 추녀 끝을 꽃 모양의 새김으로 장식하는 등 섬세함이 돋보이는 부도입니다. 지붕돌 위에는 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장구모양의 보륜을, 그리고 이중으로 된 연판 위에 보주를 얹어 놓았습니다. 섬세하기는 하지만 그 섬세함을 완벽하게 조화시켜 힘을 싣지는 못하였다는 느낌을 주는 이 부도는 남국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 동부도가 있는 곳에는 여러 기의 부도가 모여있는데 모두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 눈 여겨 살필 만하지요.

보림사 서부도(보물 제156호)는 보림사의 서쪽에 있는 2기의 부도를 가리킵니다. 보림사를 왼쪽으로 휘어 돌아 약 2km 쯤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지금은 포장이 잘 되어 있어 차로 갈 수 있습니다. 모두 팔각원당형이며 거의 비슷한 작품이나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지요. 그 중 하나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독특함 모양의 덮는 연꽃무늬 돌이 하대석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팔각의 기둥돌을 세웠습니다. 이 기둥돌에는 연꽃줄기처럼 생긴 기둥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놓고 그 안에 안상을 갖추어 두었습니다. 기둥 위의 받치는 연꽃무늬를 새긴 상대석은 연꽃잎 안에 또 무늬를 새긴 화려한 것이지요. 몸돌 역시 팔각이고 앞쪽에 문모양과 문고리가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팔각으로된 지붕돌은 약간 좁은 듯합니다. 급하게 경사가 진 지붕돌에는 기와모양이 새겨져 있지 않고 가벼운 반전이 보여지며 꼭대기 부분은 낮은 계단 모양의 복발 위에 구름무늬와 연꽃모양의 보주가 끼워져 있습니다.

또 다른 부도는 하대석이 약간 다른 모양을 하고 있고 몸돌에 문고리 모양 대신 열쇠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 외에는 거의 비슷하나 지붕돌은 대부분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살피기 어렵습니다. 꼭대기는 날렵한 반전을 보여주는 보개 위에 보륜과 보주가 얹혀 있습니다. 이 부도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새김솜씨나 돌과 돌을 서로 연결한 기법 등이 비슷하고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엽 이전에 만들어 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림사 사천왕문(유형문화재 제85호)

부도 밭을 지나 절집 마당에 이르려면 아담한 일주문과 곧바로 이어지는 보림사 사천왕문(유형문화재 제85호)을 거쳐야 합니다. 외호문이라 쓰여 있는 일주문과 함께 1951년 불에 타버리지 않은 조선시대 말기의 목조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낮은 기단 위에 원형으로 된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약한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초익공식의 주심포와 익공식을 가미한 특이한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에 높은 기둥이 없는 오량집인 이 건물은 흙벽을 하고 있고 흙바닥의 좌우에 마루를 깔고 사천왕상 네 분을 모셔놓았습니다. 대부분 맞배지붕일 경우에는 용마루의 물매가 약한데, 이 경우는 용마루의 곡선이 날렵하며 아담한 규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보물 제1254호)

사천왕문의 입구에서 보아 오른쪽에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과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을, 왼쪽에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과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을 모셔 놓았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마귀와 역신들을 신성한 절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사천왕은 조선 중종 10년(1515)에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목조사천왕상 중 현재까지 밝혀져 있는 걸로는 가장 빠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 사천왕상은 여러 개의 나무를 이어 새긴 다음, 그 위에 부분적으로 천을 붙이고 회를 바른 뒤 색을 칠하였습니다. 크기도 상당하고 새김솜씨가 뛰어난 작품이며 지국천왕과 증장천왕 앞에 힘차고 역동적인 인왕상이 하나씩 더 모셔져 있는 것도 특이한 점입니다. 동방 지국천왕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화가 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를 입고 있습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 들고있지요.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다소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비파를 들고 있으며 다리 쪽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하는 악귀가 왼쪽 다리를 받쳐들고 있습니다. 남방 증장천왕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칼, 왼손은 두 갈래로 갈라진 짧은 창을 들고 있는데 당당한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방 광목천왕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보관과 천의자락, 갑옷 등의 차림새는 다른 상들과 거의 같습니다. 오른손에는 당 幢>이라고 하는 것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현재는 없어져 알 수 없으나 보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995년 이 사천왕상의 팔과 다리부분에서 금강반야바라밀경, 월인석보 등 고려와 조선초기의 귀중한 서적 250여권이 발견되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으로 지정되었으며 지금도 한창 연구되고 있습니다.

삼층석탑과 석등(국보 제44호)

널직한 절집 마당에 이르면 대적광전(大寂光殿)과 사천왕문 사이에 일직선으로 삼층석탑과 석등이 놓여 있습니다. 쌍탑 일금당식의 절집 배치를 보여주는데 탑 사이의 중간에 석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탑과 석등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남국신라시대 삼층석탑과 석등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삼층석탑과 석등 모두 완벽하게 남아 있어 잘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기단을 이층으로 구성하였는데 가운데기둥과 모서리기둥을 새겨놓았습니다. 기단갑석은 얇은 편이며 기단 위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만 돋을새김하여 놓았고 지붕돌 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지요. 지붕돌은 날렵한 반전을 보여주며 전체적으로 가냘프고 섬세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꼭대기부분은 새김질이 섬세한 노반, 복발, 보륜, 보주, 보개 등이 단정하게 찰주에 끼워져 있어 삼층석탑의 상승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탑은 1933년 겨울 사리장치(舍利藏置)를 도둑질하기 위해 파괴하였으나 다행히 미수에 그쳤고 다음해에 복원되었지요. 그 때 일층 몸돌의 사리공에서 사리장치와 함께 탑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탑지에 쓰여진 명문에 의해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만들어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석등은 팔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데 바닥돌은 네모나고 팔각으로 괴임을 만들어 하대석을 받고 있습니다. 하대석 팔각 각면에는 안상을, 위쪽에는 귀꽃이 붙은 덮는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습니다. 간석(竿石)이라 불리는 기둥돌, 역시 팔각이며 약간 짧다는 느낌을 줍니다. 받치는 연꽃무늬를 지닌 상대석은 꽃잎 안에 다시 꽃무늬를 세밀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붉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도 팔각이며 높직하고 4면에 화창이 뚫려 있으며 지붕돌은 날렵한 경사와 반전을 지니고 있고 꼭대기에는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한 보주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단정하며 소박한 느낌을 주는 석등으로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117호)

삼층석탑 앞의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은 신라 말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많이 만들어졌던 철불들 중, 하나로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큰 불상에 속합니다. 약간 앞으로 수그린 듯한 머리는 소라모양의 나발(螺髮)을 하고 있고 육계는 제법 크게 만들었으며 전체적으로 가냘프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얼굴모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뜬 눈, 오뚝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자비로움보다는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느끼게 해줍니다. 긴귀를 지니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손은 비로자나불 특유의 지권인을 하고 있습니다. 양어깨에 걸쳐 입는 통견의 옷을 입고 있으며 옷의 무늬는 거의 평행에 가까운 흐름을 보여주지요. 이 철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약간 어색하고 손은 좀 작아져 있으나 고려시대 들어 유행한 철불의 시조격이면서 언제 만들어 졌는지 정확하게 알수 있는 불상이어서 더욱 값어치가 있습니다. 철불의 왼팔 뒤쪽에는 '대중(大中) 2년'이란 글 등 만들게 된 내력이 오목새김되어 있어 신라 헌안왕 2년(858)에 만들기 시작하여 1년 뒤에 완성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으며 몸 뒤쪽도 파손되어 종이로 바른 다음 그 위에 철금을 하여 놓았습니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보물 제157호)

최근 새로 지은 대웅전 뒤쪽의 낮은 언덕에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이 있습니다. 선종 가지산문 보림사를 세운 보조선사의 부도인 이 창성탑은 창성탑비와 함께 남국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지요. 팔각으로 된 바닥돌에 얕은 괴임을 두고 그 위에 팔각의 안상이 새겨진 하대석이 놓여 있으나 아래쪽의 하대석과 가운데 하대석은 너무 많이 손상되어 알아보기 힘듭니다. 가운데 하대석은 여덟 면에 모두 사자를 돋을새김하여 놓았던 것 같으나 역시 부분적으로만 살필 수 있습니다. 위쪽의 하대석은 구름무늬를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는데 다행히 파손을 면하고 있습니다. 기둥역할을 하는 중석도 역시 팔각이며 상하에 띠를 돌리고 아주 알아보기 힘들게 배흘림을 주었습니다. 각 면에는 가운데에 1단의 받침이 있고 위쪽은 난간모양을 나타낸 이중의 띠가 돌려져 있습니다. 몸돌도 팔각으로 되어 있는데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앞쪽에 문 모양, 열쇠고리, 그 밑에 문고리 두 개를 돋을새김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좌우 면에는 정교하고 섬세하며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신장상이 돋을새김되어 있습니다. 지붕돌은 약간 투박한 느낌을 주며 지붕돌 밑부분에는 부연이, 위에는 기와가 표현되어 있지요. 지붕돌은 다른 부재와 질이 다를뿐만 아니라 새김솜씨도 수준이 떨어지는 걸로 보아 나중에 보수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다행히 꼭대기의 부재들은 처음 만들던 당시 그대로인 듯 합니다. 노반과 꽃모양의 복발이 있으며 그 위에 장구모양의 보륜, 그리고 동부도에 보여지는 보개와 비슷한 멋들어진 보개 위에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습니다. 이 부도는 바닥돌 위의 하대석이 특이하며 몸돌이 조금 크다는 느낌을 줍니다. 탑비에 적혀진 내용에 따르면 보조국사께서 헌강왕 6년(880)에 입적하신 후 4년이 지난 다음 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을 보여주는 걸로 미루어 이 창성탑도 884년에 탑비와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보물 제158호)는 머릿돌인 이수의 제액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 이 적혀 있고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시보조선사영탑비명병서(新羅國武州迦智山 林寺諡普照禪師靈塔碑銘竝序)'라는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비문에 의하면 보조선사의 휘는 체징, 속성은 김씨, 웅주사람으로 애장왕 5년(804)에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출가하여 흥덕왕 2년(827) 가량협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해동선종을 처음 전한 도의선사의 제자인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수학한 걸로 적혀 있습니다. 한편 헌안왕 3년(859)에 그는 보림사에 머물 것을 왕에게 청하여 가지산문에 들어갔지요. 그 후 금언경이라는 사람이 철 2천5백근으로 노사나불을 만들어 선사의 종풍을 장엄케했습니다. 보조선사는 헌강왕 6년(880) 여름 향년 77세, 승랍 52세로 입적하였습니다. 그는 동국선종의 제3조였으며, 헌강왕 9년 3월 15일 문인 의거 등이 왕에게 비를 세울 것을 청하였고 이에 왕은 시호를 보조라 하고 탑명을 창성(彰聖)이라 내렸으며 보림의 사호로서 사액하였습니다. 이 탑의 조형은 남국신라 때의 것이지만 귀부는 용머리 모양으로 거의 변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곧게 세우고 있어 약간 형식화 된 느낌을 주며 머릿돌인 이수도 새김솜씨가 조금은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문까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고 규모도 커서 귀중한 금석문 자료이기도 합니다.

출처:http://www.keriss.re.kr/QandA/files/culture_cdboard/6_borim.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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