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림사 개황
보림사는 유치면 가지산 계곡(봉덕리 45번지)에 위치한 천년고찰로 동양 3보림 (인도·중국·한국)이며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된 선종의 종찰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이곳에 원표대덕(元表大德)이 터를 잡을 당시인 759년에는 초암(草庵)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듯 하며,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이곳을 찾는 이들을 흥미롭게 하고, 곳곳에 그와 관련된 땅 이름이 남아 있다. 그후 1세기를 지나,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에 의하여 '보림사'라는 이름으로 재창건된다. 체징은 당시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문의 중심사찰로 발전시킨다.
미국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 초 세조3년(1457)에서 10년(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에는 창건설화 가 이렇게 적혀있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 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 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서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후 여러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外護門)만이 남았다. 이후 지난 84년년부터 추진된 복원계획에 의해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새로 지은 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선실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
현재도 장흥군과 보림사의 보림림사 복원사업 계획에 의해, 주변 일대가 대대적으로 정비되고 있으며 유물박물관 등도 건립될 예정이어서, 어느 만큼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4호인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호인 보조선사창성탑, 보물 제158호인 보조선사창성탑비, 그리고 많은 지방문화재들이 있어 역사의 흐름과 우리나라의 불교 미술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보림사에는 선승들이 즐겨 들었던 작설차가 특산품으로 전하고, 비자림과 약수를 비록, 1일 코스의 가지산 등반로가 개발되어 찾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2, 보림사 문화재
■보림사 동부도
보림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부도로 높이는 3.6m, 보물 제155호이다. 이 부도는 보림사 동쪽 숲속에 있는 여러 부도 중의 하나로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하대석은 반구형에 가까운데 매우 평판적이며 큼직한 8엽의 복련이 덮여 있고, 각 모서리마다의 연판에 귀꽃이 있다. 복련 밑에는 높직한 면을 돌리고 8각의 각 면마다 안상을 1구씩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가늘고 낮은 8각 돌기둥으로 표면에는 조식이 없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같이 반구형에 가까운데 귀꽃이 없을 뿐 큼직한 8엽의 앙련이 돌려져 있다. 밑에는 낮은 3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높은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탑신 역시 8각의 석주형인데 우주(隅柱)의 표시는 없고 한 면에 문호형과 자물쇠형이 얕게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밑의 다른 부재들에 비하여 좁고 낮은 편으로 아랫면에는 탑신과 접하는 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 밑으로 넓은 낙수홈이 파여져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평박하고 옥개석 윗면에는 여덟 줄의 굵고 높은 우동(隅棟)이 조각되었다. 상륜부의 옥개 꼭대기에는 간석(竿石)이 놓였고, 그 위에 추녀의 우각(隅角)이 약간 위를 향한 보개(寶蓋)가 있고 외반된 이중연판 위에 보주가 얹혀 있다.
이 부도는 조각기법이 세련되었으나 평판적이고 섬약하여 입체감이 결여되었고 조형에 있어서도 중대석이 작고 좁아 불안한 감을 준다. 또한 각 부재의 너비도 좁아져서 더욱 이러한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부도형식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고려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려시대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보림사 서부도
보림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약 1Km 정도 올라 마을의 언덕 위에 아래 위로 보물 제156호인 2기의 부도가 있는데 모두 8각 원당형으로 기본 형태는 같으나 장식기법에 차이를 보이며 산 아래쪽 부도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산쪽의 부도는 옥개석부분의 파손이 심하다.
아래쪽 부도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 3단 고임석을 만들었다. 특이한 형태로 된 단엽의 복련을 8각의 모서리에만 장식한 하대석을 만들고, 윗면에는 각형의 1단의 고임을 두었다. 중대석은 8각으로 각 면에 연주형의 우주를 두텁게 모각하고 4각형으로 구획을 만든 안에 4개의 원호로 되어진 기하학형태의 안상을 1구씩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다엽으로 되어진 16엽의 앙련이 새겨지고 연판 안에 타원형의 구획 안에 4잎의 꽃 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8각의 탑신에는 앞면에 문호와 자물쇠, 그 밑에 2개의 둥근 문고리를 모각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8각의 옥개석은 추녀가 짧고 밑은 직선이다. 윗면은 경사가 급하고 우동은 낮게 만들고 전각에서 약간의 반전을 주었다. 상륜부는 낮은 반구형의 복발 위에 운문의 받침을 만들고 그 위에 연엽에 쌓인 보주와 앙련에 쌓인 보주가 중첩되어 있다.
산쪽의 부도는 방형의 대좌 위에 8각의 받침대를 만들어 각 면에 안상을 2구씩 조각하고 그 위에 복련의 하대석을 만들었다. 하대석에는 8판의 연엽을 얕게 조각하고 8면의 각 모서리에 귀꽃을 장식했다. 8각의 중대석에는 장식이 없으며 상대석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으나 아래쪽 부도보다 평면적이며 약화되어 형식적이다. 탑신석에는 한 면에만 문호와 자물쇠를 모각하였다.
옥개석 추녀에는 1단의 부연이 있는데 윗면은 우동이 잘 표현되었고 끝에는 귀꽃을 달았다. 낙수면은 완만하다. 상륜은 보륜 위에 반전이 심한 보개가 있고 그 위에 보주가 있다. 상륜부는 보개만 일부 파손되고 완전한 상태이나 옥개석은 파손이 심하다. 중대석과 탑신석의 크기가 비슷하여 투박해 보이며 1941년 도굴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1944년에 복원하였다.
이 2기의 부도는 기본형은 같은 형태로 단정한 비례와 장식적인 조각기법, 규칙성 있는 결구 등으로 볼 때 건립시기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아래쪽 부도는 형태가 완전하며 조각수법도 더 안정감을 주고 있으나 2기 모두 상륜부까지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부도로 높이 4.1m, 보물 제157호이다. 신라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선사(普照禪師)의 묘탑으로서 사찰 중심에서 동쪽의 가지산 기슭에 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 상면에 가장자리를 따라 매우 얕은 각형 1단의 굄을 각출하고 그 위에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현재는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며, 하단은 각 면에 안상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를 받기 위한 원형의 굄돌을 따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측면에 권운문을 원각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조식하였다. 굄돌 상면에는 8각으로 낮은 1단의 각형과 높은 각형 2단의 굄단을 각출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는데, 측면의 운문이 반전되듯 입체적으로 위까지 올려 덮고 있다.
중대석은 8각인데 배가 약간 부른 형태로서 배흘림을 표현하고 있다. 각 면에는 상·하단부에 대칭으로 두줄의 횡대를 돌리고 각 횡대 사이에는 모서리에 1좌씩, 그리고 그 중간에 1좌씩의 화문을 가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각 면에는 상하에 괄호형이 있고 좌우에도 중앙에 1단의 굴곡을 둔 방형에 가까운 특이한 형식의 안상을 평행선으로 이중이 되게 음각하였다. 여기에서처럼 안상이 방형이라든가 삼중으로 안상을 조각한 중대석의 양식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안상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어 간소한 듯하나 각 모서리의 중간에 좌우 측면의 앙련대와 상단의 8각 갑석형이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하면에는 8각의 중대석 상면에 맞게 놓이도록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조각하였다. 앙련은 단엽1판씩을 각 모서리에 조각하였는데, 이 판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또 하나의 연꽃잎모양을 음각하고 그 안을 고사리문과 곡선문으로 장식하였다.
탑신 굄대는 별석으로 높게 조성하여 끼웠으며 8각을 이루었는데, 각 측면에는 조각이 전혀 없으며 중간에 횡으로 한줄의 곡선을 양각하고 상하단은 낮게 갑석형을 돌렸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측면이 수직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중간의 횡선을 경계로 하여 각기 상하단에서 반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중대석의 배흘림의 의장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그리고 굄대 상면에 굄단이 없이 탑신석을 안치한 것은 상대석 상면과 같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고 특히 상단부에는 주두가 모각되어서 목조가구를 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면에는 전후면에 문비형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甲胄)가 화려하다. 옥개석 역시 8각형으로 하면에 연목형(椽木形)을 모각하였는데 탑신석에 놓이는 부분에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조출하고 처마부분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각하였다. 상면에는 여덟면의 합각에 우동이 굵직하게 조각되었고, 그 사이의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었다. 추녀는 수평이나 매우 중후하고 막새기와의 표시도 전혀 없는데, 각 모서리에는 반전을 보이고 있으며 우동 끝에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이 조식되었다. 옥개 정상에는 2단의 각형 굄을 조각하여 상륜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완형이 아니지만 복발·보륜·보주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복발은 원형이며 측면에는 여덟 귀퉁이를 표시하기 위한 화문을 조식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횡대를 돌렸다. 그리고 이 위에 죽절형(竹節形)의 간주(竿柱)가 세워지고 그 중간마다 보륜이 놓였는데 각 측면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식하였다. 이 부도의 앞쪽에는 탑비가 남아 있어서 보조선사의 행적 및 당시의 사찰의 대외관계 등 모든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비문에 의하여 볼 때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로 높이 3.46m, 보물 제158호이다. 보조선사 지선(智詵)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碑身)과 귀부(龜趺)·이수( 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다.
비문은 김영(金潁)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 )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쓴 것으로 생각되는데, 일찍이 청말의 금석연구가 섭창치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 비신을 받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두처럼 변하였으며, 이목구비의 조각이 뚜렷하여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등 뒤에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이수는 아래에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반룡을 조각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보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 석등이다. 석탑의 높이는 남탑이 5.4m, 북탑은 5.9m, 석등의 높이는 3.12m이고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1934년 해체,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사리합, 자기류, 목판, 비단, 사리, 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탑의 조성연대 및 중건 사실이 밝혀졌다. 탑지에 의하면 이 탑은 870년에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탑으로 신라시대의 초창 이래 1478년, 1535년, 1684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신라의 전형양식의 석탑이다. 특징은 상층기단의 갑석이 얇고 부연이 얕아서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하층기단에는 양우주와 2주의 탱주가 있으며, 상층기단의 탱주는 하나로 간략화되는 수법을 보인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각층 탑신에는 양우주가 있는데 2·3층 탑신석의 우주는 초층에 비해 섬약하게 처리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의 옥개받침이 5단씩이고 정상에는 각형 2단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데 이 탑신 굄대도 낮아져서 약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추녀도 기단부의 갑석과 같이 얇으며, 네 귀퉁이 전각에는 반전이 심하여 평박한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룬 것 같이 보이고 네 면의 합각도 더욱 예리한 선으로서 심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양쪽 탑이 모두 완전하여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의 순으로 각부의 부재를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양식수법이나 보륜은 남탑에는 삼륜, 북탑에는 오륜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예는 퍽 드문 일로서 귀한 자료로 주목된다. 양쪽 탑의 앞에는 각기 1좌의 배례석이 놓였는데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의 안상을 음각하여 신라시대 배례석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이 탑은 확실한 건탑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등은 전형적인 신라석등으로서 방형의 지복석(地覆石)과 지대석(地臺石)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 굄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8각이며 높은 받침과 복련석(覆蓮石)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이 1좌씩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모서리마다 연판이 조각되었는데 꽃잎 끝은 말려서 작은 귀꽃이 되었다. 간주(竿柱)는 8각이지만 표면에 조각은 없고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석은 밑에 3단의 굄을 마련하고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중엽의 앙련이 조각되었다. 화사석(火舍石)은 8각 1석이고 네 면에 화창(火窓)을 뚫었으며 화창 주위에는 얕은 턱을 파고 작은 구멍이 돌아가면서 뚫려 있다. 옥개석은 넓고 추녀 밑에는 경미한 반전이 있으며 위에는 귀꽃이 표현되었으며 정상 주위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상륜은 복잡하여 복련이 조각된 받침 위에 편구형의 보륜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축소한 보개가 얹혔는데 안쪽에 중판연화가 조각되었음은 특이하다. 이 위에는 앙련이 받치고 있는 화염보주를 얹어 완형을 보이고 있다. 이 석등 역시 석탑과 더불어 870년(경문왕 10)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시대의 철불로 높이는 273.5cm이며 국보 제117호이다. 858년에 제작되었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지만 신라 하대 9세기 불상을 특징 짓는 기준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머릿부분은 나발 등을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이는데,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의 불상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육계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으로 비만한데, 편편한 콧잔등,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은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나타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한편 지권인을 결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들어 위축된듯한 느낌을 준다. 즉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옷주름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통견의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며,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지고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는데, 평행의 옷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도 힘없이 늘어져 탄력이 없이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다소 해이된 형태와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의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면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취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조각양식으로 정착되는 것이다.
한편 이 불상은 왼쪽 어깨부분에 8행의 불상조상기가 음각되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858년(헌안왕 2) 7월 17일에 당시 무주·장사(지금의 장흥)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하여 주성한 것으로 858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명문 이외에 보조선사탑비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을 주성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위의 두 명문으로 볼 때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하여 859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조성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자료가 되는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보림사 사천왕문
보림사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천왕문.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85호.
해탈문과 대적광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홑처마집으로 중앙칸은 통로로 되어 있고 좌우의 양칸에는 4구의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낮은 1단의 기단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민흘림지붕을 세웠으며, 중앙칸 통로를 제외한 양칸 3면은 모두 흙벽으로 막았다.
사천왕(四天王)이란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에서 처음 나타난 인도의 재래신으로 수미산에 거주하면서 동, 서, 남, 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 왕들인데 대승불교에서 불법의 수호신으로 강조되어왔다. 처음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중국 및 한국에서는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보통은 모두 창을 갖지만 서방(西方)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붓과 책을, 북방(北方)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을, 그 외에는 칼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면 위치와 지물이 약간씩 달라져 동방의 지국천왕은 칼, 북방의 다문천왕은 비파, 남방의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또는 새끼줄), 서방의 광목천왕은 보탑과 당을 받쳐들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년대가 가장 빠르며 위의 예를 잘 따르고 있는 의상(倚像)으로 여러 개의 나무를 잇대어 상을 만든 다음 부분적으로 표면에 천을 붙이고 회를 칠한 뒤 채색을 하였다.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天衣)를 입고 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 들고있는데 오른쪽에서 약 20°정도 내려들고 있으며 칼은 다른 것보다 굵은 편이다.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다소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지물로는 울림통이 없이 4현만 있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하부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 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칼, 왼손은 두 갈래로 갈라진 짧은 창을 들고 있다. 동체가 당당해 보이며 성실하게 조성한 흔적이 역력하여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으로 보관과 천의자락, 갑옷 등의 차림새는 다른 상(像)들과 거의 같다. 오른손에는 당(幢)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현재는 없어져 알 수 없으나 보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사천문 입구에는 좌·우의 동방천왕과 남방천왕 옆에 인왕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부리부리한 눈, 큼직한 코, 일자로 다문입, 양쪽 팔과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에서 강건함을 엿볼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도 우수하다. 이와같이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4구가 모두 같은 형식으로 발을 아래로 내린 의상(倚像)이며 화려한 보관을 쓰고 어깨까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동체에는 채색무늬의 갑옷을 입고 양쪽 어깨에서 천의자락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허리띠에는 여러 가지 무늬와 채색을 하여 매우 화려하며 작품성도 뛰어나 보인다.
조선시대 사천왕상은 거의 모두 중국식 갑옷에 각기 다른 지물(持物)을 들고 있으며 발밑에는 악귀를 밟는 형태상의 특징과 함께, 무장한 분노상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보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돌아 어깨위에서 여러갈래로 갈라지는 자비로운 보살상의 모습이 추가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조선시대 사천왕상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도상적 특징으로 보림사의 상이 가장 앞서서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천왕문에 걸려 있는 목판의 「보림사천왕금강중신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와「보림사중창불사기록(寶林寺重創佛事記錄)」에 의해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고 1666(8)년과 1777년 2차례에 걸처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모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한편 1995년 2월에 보림사 사천왕상의 몸안(무릎과 발등)에서 고려말 과 조선초의 국보급 희귀본을 포함해 고서 250여권이 발견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거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이 무더기로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고 한다.
■보림사 약수
보림사는 현재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전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림사의 옛 영화로운 자존심을 지켜주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바로 절마당 한가운데서 펑펑 솟는 샘물이다.
이제는 '보림사' 보다는 '보림사 약수' 란 말이 사람들의 발길을 더 끄는 요소가 되었다.
이 샘물은 어느 절물과는 달리 마당 한가운데 얕은 땅속에서 수량이 늘 일정하게 솟고 있다. 말하자면 지맥에서 솟는 샘이어서 좋은 물중의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세월의 변화에 아랑곳 않고 천년이 넘게 늘 한결 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그 물줄기는 보림사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에 입을 대는 사람들은 세월의 켜켜에서 역시 이 물로 정신을 일궜던 수많은 고승.명승들과 생명줄이 닿아 있음을 느껴볼 만하다.
보림사 약수는 절물로는 드물게 80년대초 한국자연보호협회에 의해 '한국의 명수'로 지정
됐다. 좋은 샘물이 다 그렇듯 보림사 약수는 가뭄에 마르거나 장마에 넘치는 법이 없고 한
모금만 마셔도 온 몸이 개운해지는가 하면 겨울에는 김이 난다. 혀끝을 쏜다거나 별난 맛을 내는 것이 아니므로 '약수'보다는 그냥 '샘물' 또는 '생수'라고 해야 옳다
■보림사 산림욕장
보림사 산림욕장 주변에는 보림사(가지산)를 위주로 탐진댐, 자연휴양림, 봉덕계곡, 수인산(수인산성) 등 천혜적인 자연조건과 문화재가 많아 최적 의 휴양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보림사 산림욕장은 보림사 뒷편 가지산일대의 100년이상된 비자나무 239 그루와 대단위로 자생하고 있는 녹차, 대나무(왕대)숲, 단풍나무, 참나무, 꽃무릇(상사화) 등을 활용하여 누구나 산림욕을 마음껏 즐길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보림사를 보고 산림욕장에서 산림욕을 즐기면 더 좋은 건강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중 비자림산림욕장은 100년 이상된 비자나무 239그루와 비자나무 하층에 대단위로 자생하고 있는 녹차, 대나무(왕대)숲 등 사계절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비자림산림욕장내에는 편의시설(평의자,야외탁자,산림욕대), 교육시설 (야외학습장, 수목표찰, 숲해설판), 안내시설(산림욕로이정표) 등이 설치 되어 있다.
또 소나무산림욕장은 수십년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지역에 편의 시설 (평의자, 야외탁자)와 체육시설(래더, 온몸회전기, 윗몸일으키기, 줄사다리타기, 복합철봉), 수목표찰, 산림욕로 이정표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산림욕장 하단부에는 약수터가 있어 이용이 편리하다.
특히 학생의 집 또는 봉덕계곡을 이용하는 수련생 및 휴양객들이 많이 이용할수 있는 적합한 장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