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2000.05.16/김석종기자
5월이 되면 마음이 바쁘다. 북상하는 철쭉꽃 소식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남행을 서둘러 꽃마중간다. 이땅에 철쭉꽃이 맨먼저 상륙하는 남도 끝자락 바닷가. 전남 장흥군과 보성군의 경계에 솟아있는 제암산(807m). 산허리가 지금 철쭉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타오르다 못해 황홀하게 자지러지는 철쭉의 절정.
“워매, 겁나게 피어부렀네 잉” “지리산 속리산 철쭉꽃 좋다는 명산은 다 댕겨봤어도 이렇게 장한 철쭉밭은 처음 보네 그랴” “앗따, 좋네, 좋아”
줄지어 올라오는 등산객들은 홀린듯 몽롱한 표정으로 탄성을 연발한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꽃 속으로 달려들어가 사진을 찍어댄다. 그런데도 내려오는 사람들은 가소롭다는 표정. “진짜 꽃밭은 한참 더 가야 돼요” 하며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그만큼 제암산 철쭉밭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정확히 말하면 철쭉군락을 볼 수 있는 곳은 제암산이 아니다. 제암산과 사자산(666m) 사이의 간재 3거리~산불 감시초소~곰재산(629m)~곰재를 잇는 능선에서 제암산 철쭉의 백미를 볼 수 있다. 이 능선을 따라 철쭉꽃밭이 길쭉하고도 넓게 펼쳐져 있다.
신기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식수대를 거쳐 50분쯤 올라가면 오른쪽 사자산과 제암산으로 갈라지는 간재 3거리.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면서부터 철쭉꽃이 흐드러지기 시작한다. 남해의 훈풍 속에 화려하게 피어난 진분홍빛 철쭉 10릿길. 3만여평의 너른 땅에 소나무 몇그루를 빼고는 잡목 하나 없는 철쭉밭. 말 그대로 ‘천상의 화원’이다. 눈을 어디로 돌려도 그 꽃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온통 철쭉꽃 세상이 펼쳐진다.
철쭉 절정기인 요즘은 장흥읍내에서도 벌건 빛이 보일 정도로 철쭉꽃이 능선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드문드문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가꾸어놓기라도 한듯 한무데기로 빽빽하게 피어난 ‘철쭉의 바다’. 때맞춰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붉은 파도를 일렁거리며 이 기막힌 화원을 휘몰아간다. 여울져 흐르는 파도의 끝은 곰재산 정상에서 흰구름과 맞닿는다.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꽃보라가 쏟아져내리는 것처럼, 제암산이 온몸으로 꽃을 품어내는 것처럼.
제암산 철쭉은 유난히 밑둥이 굵고 사람의 머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키가 크다. 다른 곳보다 꽃이 큼직하고 진분홍과 연분홍이 섞여 기막힌 색깔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곰재 아래쪽 주인없는 무덤과 폐쇄된 헬기 착륙장 주변에 피어있는 철쭉은 선홍빛으로 색깔이 더욱 강렬하다.
“그동안 지리산이나 소백산의 명성에 가려 남도 산악인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죠. 요 몇년 사이 갑자기 명소로 떠올라 외지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올해도 벌써 5만여명이 다녀갔습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제암산 철쭉의 장관에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장흥군청 공무원으로 제암산악회 회원이기도 한 윤두환씨(33)는 “하나의 무리로 이어진 거대한 철쭉 장관은 제암산 말고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자랑한다.
소백산맥 끝자락인 제암산과 사자산은 장흥읍 동편에 자리잡고 있다. 제암산은 정상에 임금 제(帝)자를 닮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 남북으로 뻗은 능선이 장쾌하면서도 준마의 등허리처럼 미끈해 매우 당당한 느낌을 준다. 곰재는 동학군이 관군에 쫓겨 넘었다는 고개. 보성군 웅치면의 지명도 여기서 비롯됐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는 사자산은 사자가 고개를 쳐들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제암산은 도선국사의 ‘옥룡자유산가’에 왕족의 묘자리에 어울릴 만한 군왕지지가 있다고 기록돼 있는 명당터. 가난한 형제가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떨어져 죽어 바위가 됐다는 전설의 형제바위 아래쪽에는 의상암과 원효암이 있었다. 두 암자의 샘물을 찾아 마시면 영생복락한다고 해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제암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호젓하게 걷다보면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인 천관산, ‘호남의 금강’으로 불리는 월출산,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과 팔영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의 경치도 그림 같다. 비취빛으로 잔잔한 득량만과 수문포, 남해로 고개를 내민 고흥반도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의 경치가 일품이다.
제암산 철쭉은 이번주가 절정. 때맞춰 내린 비로 한꺼번에 만개했다. 꽃과 잎에 덮인 황사 먼지까지 씻어내려 꽃이 더욱 화사하다. 백두대간 철쭉은 제암산을 불태운 뒤 지리산으로 번지고 덕유산으로, 소백산으로, 태백산과 정선 두위봉으로 북상한다. 진분홍 철쭉꽃 속에서 꽃같이 웃는 사람들. 철쭉이 있어 5월의 사람들이 더욱 정겹고 아름답다.
▲ 여행길잡이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하루 4차례 장흥행 버스가 있다. 기차나 버스로 광주에 도착, 장흥행 시외버스를 이용한다. 신기마을까지는 30분마다 군내버스가 다닌다.
승용차는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광산(비아)교차로~13번 국도~나주~23번 국도~장흥~제암산. 안내 산행단체를 이용하면 시간과 경비를 줄일 수 있다. 한국등산중앙연합회 (02)743-9818.
장흥읍내에 여관이 많다. 유치면 유치자연휴양림(863-6350)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린 삼림욕장. 주방과 욕실을 갖춘 숲속의 집 3만~8만원. 보성군 쪽 제암산자연휴양림(0694-852-4434)은 4만~6만원.
장흥읍내 탐진각 뒤 금강산(864-1616)은 산악인들이 즐겨찾는 고기집. 옹기 불판에 굽는 녹돈(녹차를 먹여 키운 돼지고기) 생삼겹살(1인분 5,500원)과 등심(1만원), 아구찜·아구탕(1만5천~3만원), 삼계탕(6,000원)을 잘한다. 주인 김금심씨는 지난해 순천 낙안읍성 음식축제에서 바지락회로 1등상을 받았다. 바지락회는 미리 주문해야 한다. 장흥군청 앞 녹원식당(863-8900) 한정식은 각종 생선회와 해산물, 젓갈 등 40여가지 푸짐한 밑반찬이 나온다.
대표적인 특산물은 표고버섯. 지방자치단체 중 전국 최초로 장흥군청(지역경제과 860-0377)이 표고음료와 표고고추장·된장·간장을 만들어 판매한다. 이밖에 탐진강 은어, 득량만 바지락과 키조개가 유명하다.
▲해마다 5월초면 철쭉제 열려
곰재산 일대의 철쭉 군락지는 예전에는 잡목이 우거져 헤쳐나가기가 어려웠다. 김재종 장흥군수 등 군청 직원들이 주축이 된 제암산악회가 10여년에 걸쳐 잡목 제거작업을 하고 등산로를 가꾼 덕분에 말쑥한 철쭉꽃밭이 만들어졌다.
장흥군 장동면 금산저수지를 지나 신기마을 공설묘지 옆 주차장이 철쭉산행 들머리. 보성군 웅치면 제암산휴양림으로 오르는 코스도 간재 3거리에서 만난다.
해마다 철쭉철에 맞춰 열리는 철쭉제는 제천의식, 가족등반대회, 패러글라이딩 시범비행, 민속제, 향토음식축제, 시조명창대회, 철쭉선아·선비선발대회 등의 행사가 다채롭게 열린다.
올해 5월7일로 잡았던 철쭉제는 구제역 때문에 치르지 못했다. 장흥군청 문화공보과 860-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