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2003.01.29
장흥 천관산(723m)은 남도의 억새산이다. 촘촘하게 얽힌 산자락이 남으로 갈수록 밋밋해지다 회진 해안 앞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불끈 솟은 바위산. 장흥 관산 벌판에서 바라본 능선에는 기기묘묘한 암봉들이 공룡의 뿔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이런 바위산에 어떻게 억새평원이 숨어있을까. 겉으로 보이는 산세로는 억새가 자랄 만한 곳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장흥 출신의 소설가 한승원이 자신의 고향땅에 대한 기억을 쓴 짧은 토막글 ‘억새숲이 우는 소리’를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그냥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자드락길 굽이굽이마다 들솟아 있는 억새풀, 띠풀, 싸리풀들이 내 키를 재면서 겨울 찬바람에 몸부림치며 울어댔다. 내 몸속에 그 억새숲의 울음이 절절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바람소리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 속에 머무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설 공부를 할 요량으로 천관산 천관사에 갔다가 들었다는 억새 우는 소리. 그는 당시의 기억으로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썼다고 고백했다.
때로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스산하고, 때로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한 억새밭. 달빛에 젖으면 푸근한 솜억새로, 햇살을 받으면 화사한 금억새로 변한다. 억새 만큼 변화무쌍하고, 마음을 파고드는 들풀이 있을까.
먹빛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녘 천관산에 오른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받은 금억새가 가장 아름답다기에 일부러 새벽 산행을 택했다. 등산로는 제법 경사가 심해 버겁지만 산길은 참 아름답다. 산죽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파도소리 만큼이나 상쾌하다. 어둠 속에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바위 능선은 마치 사냥개의 이빨처럼 날카롭기도 하고, 신전의 돌기둥처럼 우뚝 솟아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산아래 관산 들판은 달빛에 비쳐 바다나 호수처럼 보였다.
천관산은 억새가 아니어도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내변산과 함께 호남의 손꼽히는 명산. 천관이란 이름은 ‘하느님의 면류관’이라는 뜻이다. 산줄기의 기암괴석이 마치 왕관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산사의 불탑처럼 바윗돌을 쌓아놓은 듯한 아육광탑, 용 두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구룡봉, 원숭이 모양을 한 불영봉…. 이름에 걸맞게 웅장한 바위 능선에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
천관산에는 전설도 많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천관보살에 대한 얘기. 신라 김유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바로 기생 천관.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난 뒤 마음을 잡고 천관의 집으로 가는 말의 목을 친 일화까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 뒷얘기가 바로 천관산으로 이어진다. 삼국통일을 한 김유신은 천관을 수소문해 찾았으나 천관은 백마를 타고 천관산으로 숨어들었다. 기생 천관이 김유신을 시험했던 천관보살이라는 얘기다. 천관사의 주지 무일스님은 천관산은 문수보살이 있는 오대산, 법기보살이 있는 금강산과 더불어 신령한 산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신산(神山)이라고도 불렸다. 1,200여년 전 세워졌던 천관사도 한때 89동의 법당이 있던 명찰로 중국에서까지 유학을 왔다고 한다. 지금은 극락보전과 요사채만 남아있다.
천관산 자연휴양림에서 1시간쯤 오르면 환희대(720m)가 나타난다. 책바위가 여러겹 쌓여 있는 환희대에는 ‘이곳에 오르면 누구나 큰 기쁨을 얻는다’는 안내판이 서있다. 안내판에 쓰여 있는 대로 풍광이 장쾌하다. 관산 벌판과 회진 앞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바위능선만 가득했던 길은 환희대를 지나면서 완만한 억새능선으로 변한다. 이정표에는 정상까지 1㎞로 나와 있지만 억새밭은 수만평이나 된다. 바람이 부는 동쪽 능선에는 억새가 눈부시게 화사하다. 아직은 꽃대가 푸른 서쪽 능선의 억새도 일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절정기는 이번 주말이다.
가리마같은 능선을 따라 이어진 정상 연대봉까지 바람에 몸을 부대끼며 억새가 흩날린다. 바람이 세차게 쓸고 가는 억새밭에 서면 ‘으악새’ 우는 소리가 가슴팍 깊숙이 메아리친다. 일출과 함께 금빛으로 물들었던 억새밭은 금세 은빛으로 반짝거리며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를 부린다.
억새능선 너머는 고만고만한 섬들이 떠있는 다도해다. 바다 역시 억새처럼 그 빛깔이 다양하다. 한승원이 소설 ‘불의 딸’에서 이 바다를 ‘은빛으로 번쩍거렸고, 금빛 칠을 해놓은 것 같았고, 허연 눈이 덮여 있는 것 같았고, 회칠을 해놓은 것 같았고, 흰 옥양목 천을 깔아놓은 것 같았고, 쪽빛 물을 들여놓은 것 같았고, 바닷속에 있는 수만 수억의 고기들이 일시에 떠올라 푸드덕거리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었다. 그가 말한대로 바다는 은빛으로 빛났다.
이처럼 걸출한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까닭에 장흥땅에 글솜씨 좋은 문인들이 많은 걸까. 한승원뿐 아니라 이청준과 송기숙도 천관산과 회진 앞바다를 바라보며 문재(文才)를 닦았다고 한다.
장흥 천관산은 남녘 끝에 자리잡고 있다. 장흥 출신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 선생의 말대로 ‘땅도 궁벽하고, 사람도 많지 않은’(地僻, 人僻, 姓癖) 남도땅 끝머리에서 다도해를 지키는 봉수대처럼 솟아있다. 성소(聖所)처럼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위절벽을 두르고 있어 더 신비스럽다. 환희대에 오르면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름답고 화려한 억새가 춤을 춘다.
▲여행길잡이
호남고속도로 서광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첫번째 나들목인 광산 IC로 빠진다. 나주쪽 13번 국도로 좌회전, 13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 나주를 지나 영암까지 이어진다. 영암~강진을 지나 장흥쪽으로 내려오면 천관산 휴양림으로 빠지는 857번 지방도와 만난다. 천관산휴양림에서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더 내려가면 천관산 관광농원이 있는 관산읍. 관광농원 뒤로도 등산로가 놓여 있다. 산행 시간은 어디서 출발하나 왕복 4시간 안팎이 걸린다. 나주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장흥으로 내려가 837번 지방도를 탈 수도 있다. 길이 왕복 2차선으로 좁은 편이나 차량이 드물어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는 좋다.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장흥까지 하루 4편 버스가 다닌다. 5시간30분 소요.
천관산 자연휴양림의 통나무집에서 묵을 수 있다. 통나무집은 5평짜리 1동, 7평짜리 4동, 8평짜리 1동, 15평짜리 1동 등 모두 7동. 5평짜리는 난방이 안돼 지금 사용할 수 없다. 4인가족은 7평짜리가 적당하다. 2만8천원. 주말 요금은 4만원. 15평짜리는 4만2천~6만원. (061)867-6974. 관산읍에는 로얄장(867-3336)과 한일관광모텔(867-8864), 천관산관광농원(867-7890)에서 묵어도 된다. 영암 월출산 아래에 있는 월출산 관광호텔(473-6311)도 머무르기 좋다. 천관산까지는 50㎞ 정도 떨어져 있지만 산행 후에 피로를 풀 수 있는 온천도 갖추고 있다. 6만원. 주말은 6만8천원.
유치면 가지산 계곡의 보림사는 국내에 선종이 가장 먼저 정착된 고찰. 인도, 중국과 더불어 동양 3보림이라고 한다. 보림사에는 철조비로사나불 등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가 많다. 회진면 대리 방산마을에는 한승원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고갯길 너머 진목리는 이청준의 고향으로 문학기행지로도 좋다.
장흥/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