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2001-10-12

사람들 가까운 곳에 항상 편안한 얼굴로 서 있지만 제 속으로는 깊은 우물의 밑바닥 같은 신비를 간직하는 산이 있다. 두레박을 내리고, 물이 끌려 올라오는 동안의 기다림 같은 느낌을 주는 곳. 천관산이 그랬다.

천관산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무던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산이다. 정상을 완전히 뒤덮어버린 억새도, 사람의 눈을 한순간에 매료시켜 버리는 크고 작은 바위들도 모두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스로 발품 팔아 산 안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에게는 산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깊이를 보여준다.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은 것도 천관산이 가진 미덕이다. 등산로의 대부분이 능선과 능선을 타고 오르는 완만한 길이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산을 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천관산을 그저 그런 야산에 비교하면 안 된다. 해발 723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수많은 기암괴석과 봉우리들이 곳곳에 턱하니 버티고 있다.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능가산과 더불어 호남 5대 명산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기바위, 사자바위, 종봉, 천주봉, 관음봉, 선재봉, 대세봉, 석선봉, 돛대봉, 갈대봉, 독성암, 아육탑, 환희대, 아홉 개의 봉우리가 모여 만든 구룡봉. 모든 봉우리들이 여느 산에서 흔히 대할 수 없는 기이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과 닮았다 하여 이름도 천관산(天冠山)이라 불리는 곳이다.

천관산에는 수많은 등산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어디에서 산행을 시작해야 할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디라도 상관은 없다. 모두 제 나름대로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결국 억새밭으로 집결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이에게는 내려오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남겨진다.

봄 천관산은 진달래, 가을 천관산은 억새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오르는 길 어디를 둘러봐도 억새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크게 담아두었던 기대는 한발한발 산을 오를 때마다 그만큼의 양으로 꺾여나갔다.

억새를 만난 것은 천관산 정상을 눈앞에 두었을 때다. 그 엄청난 억새 군락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긴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한순간에 던져준다고 하면 될까. 느슨하게 방심하고 있던 마음을 향해 그 엄청난 억새들이 갑자기 덤벼들었다. 그 수많은 억새들 속에서 잠깐 자유로웠다. 일상이 주는 갑갑함으로부터, 세상의 무거운 근심들로부터.

구룡봉에서 연대봉까지 완만한 능선을 타고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억새는 자기들끼리 몸을 붙들고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분명 숲이었다. 길이 아닌 곳은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거대하고 울창한 억새들의 숲. 사람이 가지 못하는 길을 억새가 대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도 천관산 정상 연대봉으로 사람들을 잡아끄는 것은 저 억새들일 것이다.

천관산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어디 억새뿐일까마는 지금 천관산에서는 억새가 유난히 빛을 발한다. 온 능선을 가득 채운 억새 속에는 다른 무엇이 끼여들 틈이 없다. 억새밭 하나만 눈에 담아도 부지런히 팔았던 발품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받은 셈이 된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억새는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있다. 그 모습이 물결같다. 끝없이 펼쳐진 억새의 물결. 그래서일까. 억새와 억새 사이로 난 능선길을 따라 걷는 사람도 쉼 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가을 천관산의 억새가 유난히 돋보이는 이유가 있다. 억새가 가을 천관산의 색깔을 구분짓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빛이 깊어질수록 저 억새들은 천관산을 천관산이게 하는 수많은 바위와 닮아갈 것이다.

하얀 억새꽃을 피워낸 다음에는 잎의 풋풋한 초록을 버리고 선 채로 말라갈 것이다. 마르면서 바위와 같은 진한 갈색으로 몸을 물들이며 스스로 깊어질 것이다.

천관산 산행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또 하나 있다. 수많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도해의 풍경이 그것. 물고기 비늘처럼 윤기를 내며 반짝이는 푸른 바다가 하늘 한자락처럼 넓게 펼쳐진다. 그 위에 점점이 박힌 크고 작은 섬들은 먹구름 같다.

연대봉에 오르면 다도해와 억새가 어우러져 흔하지 않는 풍경을 만든다. 현실의 경계를 넘어와 다른 세상으로 들어선 느낌이 이럴까 싶다.

가을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 뒤로 늦은 오후의 가을볕이 달라붙는다. 그 가을볕 속에는 천관산에서 보낸 하루의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 같다. 사람들 속에는 저 넓은 억새밭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교통: 장흥에서 관산행 직행버스가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소요시간은 35분이다. 관산읍에서 천관산 등산로 입구까지는 도보로 30분 거리다. 택시를 이용하거나 군내버스를 타고 방촌에서 내리면 된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장흥읍에서 23번국도를 타고 계속 직진하면 관산읍 이정표가 나온다. 관산읍으로 들어가지 않고 5km 더 직진하면 방촌마을이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천관산 등산로 입구인 장천재가 나온다.

숙식: 관산읍에 로얄여관(061-867-3336/8),

반도장(867-3737/8080), 영빈장(867-7455)

대성여인숙(867-2177), 천관산관광민박(867-7711)이 있다.

천관산 관광농원(061-876-7790)에서 통돼지바베큐, 닭훈제, 숯불구이, 우리밀 칼국수 등을 맛볼 수 있다. 특별한 음식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다하우스(862-1021)에서 바지락회와 키조개회를 먹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주변관광: 방촌문화마을, 장천재, 보림사, 제암산, 사자산

여행쪽지: 10월 21일 연대봉 억새 군락지에서 천관산 억새제를 개최하고 전날 장흥읍에서는 전야제가 펼쳐진다. 이 기간에 맞춰 천관산을 찾는 것도 좋겠다. 천관산 등산로는 대부분 관산에서 시작하지만 탑산사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는 대덕이 출발점이다.

정상철 기자(dreams@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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