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2003.3.11
문림의향의 고을, '장흥'에는 등산인들을 유혹하는 빼어난 산들이 많다. 억새밭과 기암괴석, 탁트인 다도해가 조화를 이뤄 한 폭의 그림 같은 '천관산'을 비롯, 배를 깔고 엎드려 고개를 들고 있는 듯한 거대한 사자형상의 '사자산'과 천년가람 보림사를 안고 있는 '가지산' 등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에다 5월이면 3만여 평에 달하는 온 산을 붉은 빛으로 장식, 산행객의 혼을 빼놓는 '제암산'과 천혜의 요새지로 철옹성 같은 느낌을 주는 '수인산'도 사랑받고 있는 장흥지역의 산들이다.
그런데 모두들 한 가락씩 하는 명산 속에서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산으로, 빼놓으면 너무 억울한 산이 바로 [억불산]이다. 장흥읍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산, 높이는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능선이 길고 부드러워 마치 고운 여인이 치맛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걷는 것과 같은 형상으로 장흥읍을 내려다보고 있다. 수줍은 진달래를 먼저 보고자 한결가족이 선택한 억불산. 출발하면서 소식을 전했더니 장흥읍에 보금자리를 꾸린 '다함이네'가 동행하겠다 한다. 많은 것들을 함께 하는 우리가족의 소중한 동행가족이다.
산행은 이름도 맘을 푹 놓이게 하는, 장흥공용정류장의 건너편인 '평화마을'에서 시작한다. 주민들과 외지인들에게 '억불산을 즐기라고' 마을 위 산 아래에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평화약수터가 자리잡고 있다.
몸에 이롭다는 약수 한 모금으로 몸을 축이고, 혹 땀이 나면 먹을 수 있도록 작은 물통에 물을 채운 다음 산길에 접어든다.
처음엔 야트막한 야산을 오르듯이 길이 열린다. 산 전체를 빙 돌아 임도를 뚫어놨기에 길은 널찍하다. 산길 초입엔 목장승 하나가 떡 버티고 서서 '여기가 억불산'임을 알리고 있다. 아직은 너른 길. 조금씩 경사가 심해지면서 산길 맛을 낸다. 길 옆 숲 속에는 곳곳에 진달래가 수줍고도 농염하게 피어 눈길을 붙잡는다. 겨울의 더께도 채 벗어버리지 못한 사이에 봄은 이렇게 무르익었나 보다.
그리고 산길에 들어선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또 약수터가 나타난다. '억불약수'. 아직 몸엔 땀이 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데 그냥 가면 아쉬울 것 같아 공연히 또 한 모금 입술을 적신다.
이제 진짜로 산길로 접어든다. 임도를 벗어나 샛길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편백나무들로 가득찬 숲이 반긴다. 하늘이 보이지 않아 어둑할 정도다. 10여분을 이렇게 편백숲속을 걷는다. 삼림욕 하기에 정말 안성맞춤이라는 느낌이 저절로 몸에 다가온다.
싱그러운 공기를 흠뻑 마신 뒤 다시 나타나는 임도를 만나면 이제 진짜 산길로 접어든다. 시작하는 길목엔 행정기관에서 의자와 탁자를 만들어 놓았다. 산에 오르다 지친 사람은 누구나 편히 쉬어가라는 배려가 고맙다.
본격적인 산행 길. 한결이와 다함이가 앞장을 선다. 따로 간다면, 벌써 짜증을 부렸을 아이들인데 둘이 만나기만 하면 저렇게 신나 한다. 지난해 늦가을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때도 그랬고, 그 이전 고흥 팔영산에 갔을 때도 그랬었다. 뭣이 그리 재밌는지, 뒤쪽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어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여하튼 고마운 일이다.
이제 맘 먹고 산에 오를 참인데, 산 정상쪽을 배경삼아 우뚝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발길을 다시 멈추게 한다. '보호수' 간판이 세워져 있다. 수령 200년, 높이 20m, 나무둘레 3.5m. 장흥 고씨와 제주 양씨가 조상에게 공을 빌고 바로 위에 자리잡은 묘를 수호하기 위해 심었다는 간단히 설명이 적혀져 있다.
다함이 아빠는 "장흥이 낳은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송기숙씨가 무척 애정을 가진 소나무"라고 얘길 전해준다. 송기숙씨의 고향마을이 바로 여기에서 1km 남짓한 산아래 용산면이라서 자주 찾았다는 것이다.
소나무와 떡갈나무 등 잡목이 우거진 길을 따라 올라간다. 여기서부터는 제법 경사가 큰 바윗길이 전개된다. 이 곳의 진달래는 아직 망울을 터뜨리지 못했다. 작은 산이지만, 온도차는 이렇게 분명하게 나타나는가 보다.
숨도 가끔은 골라야 할 정도다. 한결이와 다함이는 벌써 바위가 절벽을 이룬 중간 능선까지 올라가서 '야호!'를 지르고 있다. 그런데 한결엄마는 너무 처진다. 해마다 삼월이 되면 너무 바쁜 일상 때문에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는데, 혈액순환 순조롭게 하고 몸의 노폐물을 내보내고자 시작한 단식이 삼일째라서 그런지 올라오는 폼이 영 아니다. 저러다 정상까지 가기는 갈려나 싶다.
한 두 번씩 걸음을 멈추고, 조금은 위험하기까지 한 바윗길을 올라서니, 한 쪽은 눈이 아찔한 벼랑이다. 이 능선 조금 아래부터는 앞으로 이 산을 불태울 철쭉들이 서서히 그 생명을 올리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키가 제법 큰 철쭉들이 지천이다. 능선에 서서 이리저리 눈을 돌려보니 산 아래에서 봤을 땐 그리 위엄스럽지 않았던 '며느리 바위'가 웅장한 자태로 서 장흥읍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억불산을 대표하는 이 바위는 멀리서 보면 어린애를 업은 여자형상을 하고 있지만, 막상 위에서 보니 위험스럽고 아찔하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슬픈 전설을 음미하면서 잠시 등산객들이 쉬는 곳이기도 하다.
오랜 옛날,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마음이 인색하고 고약한 성격을 지닌 시아버지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착한 일을 한 덕에 고승으로부터 재난에 대비한 예언을 들었단다. 아이를 업고 재난을 피하는 도중에 애절한 시아버지의 외침을 무시하지 못해 뒤를 돌아봐 석상이 되어버렸다는 전설을 간직한 며느리 바위는 오늘도 장흥읍을 내려다보며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전해져 오는 옛이야기에서 깨어나 능선에 서면 정상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그보다는 주위의 전망이 눈을 붙잡는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남서쪽) 우리 부부의 추억이 가득한 천관산이 우뚝 서 있고, 바로 왼쪽 앞(동쪽)으로는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자산이 자리잡고 그 뒤로는 얼마 후면 철쭉이 불바다를 이룰 제암산이 눈에 들어온다. 앞 정면(동남쪽)으로는 수문포과 장재도 앞바다가 퍼런 물빛을 반짝이고, 바로 등뒤(북동쪽)으로는 탐진강을 모태삼아 삶의 뿌리를 이어가는 장흥읍과 주위의 그 너른 평화벌판이 가득 찬다.
정상까지는 너무도 쉬운 길. 두 눈을 온통 주위에 빼앗기며 조심조심 바위틈을 걷는다. 꼭 한 시간만에 정상에 다다랐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정상엔 이미 여러 산행팀이 자리잡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산에 올랐다. 정상 표지석엔 '연대봉'이라 씌어 있고 높이는 518m로 기록돼 있다.
준비해 간 김밥과 귤을 먹으면서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다 본다. 한 시간만 땀을 흘리면 이렇게 눈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흐뭇하기만 하다.
모처럼 가족 전체가 함께 한 사진도 찍는다. 양 가족이 서로 찍어주면서 "두 가족이 함께 오니 드디어 온 식구가 들어간 가족산행 사진을 갖게 되었다"고 즐거워한다.
내려가는 길은 여러 군데로 놓아져 있었다. 이제는 바윗길이 아닌 흙길을 밟는다. 눈길 닿는 데마다 진달래가 벙그러지고 있다. 여유있게 바라보니 진달래도 그 색과 모양일 얼마나 다양한지…. 조금만 마음을 비우면 세상은 이리도 멋진 웃음을 선사하는 걸.
힘들 것도 없이 그냥 쭉 푹신한 흙과 낙엽을 밟으며 내려간다. 늦은 시간에도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은 그치지 않는다. 대부분 가족산행이다. 참으로 다감하고 편안한 모습들이다.
가족산행으로 너무 좋은 1.9km의 산길은 쉽게 그 끝을 드러냈다. 다시 선 평화약수터. 마지막으로 한 모금의 물로 상큼하게 산행을 마무리한다. 그 사이 더욱 가까워진 한결이와 다함이가 헤어지지 않으려고 부모를 함께 조르는 가운데 넘어가는 태양이 크게 웃음을 짓는다.
길과 글을 사랑하는 한결가족 ks0005@lyco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