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2003년 02월 19일

억불산 편백나무숲

수수께끼 하나. 삼별초가 항전한 군사 요충지였고, 동학의 최후 격전지였을 뿐 아니라 현대에는 빨치산 항전지였던 곳은 어디일까. 답은 해남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낀 남도의 끝자락 전라남도 장흥이다.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과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고향으로 남도의 문림(文林)으로 불리는 곳. 또 한국 현대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서편제’의 이청준, ‘녹두장군’의 송기숙,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한승원의 고향이자 작품 무대가 됐고, 이들이 문재(文才)를 닦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흥은 아직도 ‘숨겨진 땅’이다. 서쪽으로는 ‘남도 답사 1번지’ 해남과 강진, 동쪽으로는 ‘차의 고향’ 보성과 닿아 있으면서도 외부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토박이들은 “장흥 하면 어째 경기도 장흥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라~”라고 푸념한다. 번듯한 공장 하나 없을 정도로 개발이 안됐다는 불만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청정지역이라는 얘기다.

풍광도 남도의 이름난 여행지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들판에 우뚝 솟은 산의 모양새는 저마다 독특하고, 봄빛으로 출렁거리는 바다는 남도의 가락처럼 수수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배어있다.

# 산

장흥은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산세가 수려한 곳이다. 봄이면 철쭉 능선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제암산, 정상에 갈대군락지가 늘어서 있고 능선이 하나님의 면류관을 닮았다는 천관산, 읍내에서 빤히 올려다 보이는 억불산(518m) 등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는 산들이다. 억불산 정상에는 기암이 우뚝하고 산자락은 여인의 치마폭처럼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8부 능선쯤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듯 툭 튀어나온 기암도 신비스럽다.

“저것이 며느리 바위여라. 며느리가 애를 업고 가다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당께. 바위보다는 숲이 더 좋아라”

못된 시아버지가 탁발을 하러 온 선승을 구박했는데 며느리가 몰래 쌀을 퍼주었다. 선승은 몇 월 며칠에 수해가 날 것을 일러주고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간절한 외침에 뒤를 돌아보다 그만 돌이 됐다는 전설이다.

며느리 바위 아래에는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남도대학교(옛 장흥대학) 옆에 펼쳐진 편백나무 숲은 무려 20만평. 편백나무 80%, 삼나무 15%, 리기다 소나무 5%로 구성된 숲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다. 얼마전 간벌을 했는지 나무들이 길섶에 쌓여있다. 잘려나간 나무는 굵지는 않았지만 나이테를 세어보니 얼추 35~40년이나 됐다.

이문규 장흥군청 환경산림과장은 “작고한 손석연씨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 사이에 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산림에 대한 혜안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림녹화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대부분 무작정 소나무만 심었는데 편백 같은 부가가치가 높은 나무를 심었다는 것부터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워낙 나무를 아낀 탓에 간벌을 제때 해주지 않아 수령에 비해 나무가 굵지 않을 뿐이란다.

편백숲을 가로질러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가 나타난다. 제주에서 올린 봉홧불을 천관산이 이어받고 다시 억불산에서 북쪽으로 신호를 이었다. 울창한 편백숲과 바위 봉우리가 어우러진 억불산 정상에서는 남도 해안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밖에 사자의 모습을 닮았다는 사자산, 동양 3대 보림 중 하나인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 등도 저마다 독특하다.

# 바다

득량만을 끼고 있는 장흥의 바다는 장흥 출신 문인들의 ‘창작의 고향’이다. 포구는 옛날 모습 그대로 수수하다.

문학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남단의 회진포구. 고만고만한 고깃배들이 정박해있는 회진은 옛날엔 제법 큰 포구였다. 한때는 목포까지 여객선이 들락거릴 정도로 번창했지만 요즘은 70, 80년대 영화 장면처럼 향수를 느끼게 한다. 회진은 소설가 이청준(진목리)과 한승원(신상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도, 장흥이 그저 태어난 고향 고을이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제 고향을 알지 못했고, 나의 삶과도 크게 상관을 지어 생각해 본 일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어느 무렵부턴가, 나는 보잘 것 없으나마 나의 소설들의 많은 것들이 장흥에서 태어났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의 무대, 인물, 정서…. 그리고 나의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나의 삶 또한 거기에 끈질긴 탯줄이 이어져 있고, 그곳을 요람으로 나의 삶과 소설이 자라오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이청준)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평생동안 그 고향에 빚진 듯이 살지 않으면 자기가 나온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고향 안에는 자기가 빠져나온 자리가 비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거기 비어 있는 자리를 늘 채우려고 합니다”(한승원)

남도의 끝자락에서 바다와 함께 자란 두 사람은 유난히 바다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고, 그런 작품 속에는 ‘고향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녹아 있다. 장흥의 포구는 영화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용산면 남포는 영화 ‘축제’의 무대. 이청준의 동명소설을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한 곳이다. 열댓 가구가 사는 자그마한 어촌 앞에는 무인도인 소등섬이 떠있다. 소등섬 옆으로 뜨는 일출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장재도를 끼고 있는 수문리 앞바다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수문리 개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단 두 곳에서만 발견된다는 기수갈고동 등 희귀생물이 서식한다. 도요새 등 철새도래지로도 알려져 있다. 소라껍데기에 밧줄을 이어 만든 주꾸미 그물이 싸여있는 해변은 평화롭다.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제각각 멋을 갖추고 있는 장흥. 산자락을 들추면 전설이 있고, 바다에 서면 문학의 향기가 느껴진다.

▲여행길잡이

서해안고속도로 종착지인 목포IC에서 빠진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목포(항)’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해남·영암 방면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면 영산강 하구언 방조제길. 국도 2호선을 타고 달리면 장흥으로 이어진다. 장흥읍내 시외버스터미널 앞 ‘Y’형 SK주유소 3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안양면·보성 가는 길. 직진하다 첫번째 3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억불산 자락으로 이어진다. 남도대학교 바로 못미쳐 오른쪽에 등산로가 있다. 서울∼장흥간 하루 4차례 고속버스가 다닌다. 남도대학교 앞길로 내려서 우회전하면 용산면 방향. 용산면사무소에서 좌회전하면 해안길. 왼쪽에 ‘영화 축제 촬영장’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77번 지방도를 타고 대덕 방면으로 내려가다보면 회진포구 이정표를 볼 수 있다.

터미널 뒤의 현대식육점(061-863-3468)은 육회비빔밥집. 고기를 듬뿍 넣은 비빔밥과 지난해부터 묵혀온 신김치가 입맛을 돋워준다. 5,000원. 장흥군청 옆에 있는 신녹원관(863-8900)은 이름난 한정식집이다. 남도 한정식의 푸짐한 상차림을 볼 수 있다. 상차림에 따라 값이 다르지만 2인 기준 3만원 정도. 읍내에 장흥관광호텔(864-7777), 그랜드파크모텔(863-0042), 목련장(862-7270), 신성장(863-9925), 가든장(863-7007) 등이 있다. 회진에는 해진장(867-3360), 수성장(867-5999)이 있다.

장흥/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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