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중기 요절한 천재문인 기봉 백광홍(岐峰 白光弘, 1522-1556)의 스승은 일재 이항(一齋 李恒)이었다. 당시 조선 중-후기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비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기봉의 부음에 대해 '그 짝을 찾기 어려운 재주와 행실이었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크게 베풀지 못하였음이 애석하다'며 대성통곡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기봉은 그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는 백광홍(白光弘)이다.
기봉에 버금가는,아니 그에 못지않은 천재시인으로 문명을 날렸던 시인이 있었으니 바로 기봉의 아우인 옥봉 백광훈 (玉峯 白光勳.1537~1582) 이다.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에게 시와 글을 지어주어 감탄케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으며 당대 시인으로 유명한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 도는 '삼당파(三唐派) 시인'으로 불리었고,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영화체(永和體)에도 빼어났던 인물이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옥봉이 해남으로 이사를 가고 거기에서 삶을 마감, 지금은 해남 출신의 역사인물로 공인받고, 해남군에서 그의 유물관을 조성하고 생가도 복원하여 해남의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는점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 관서별곡을 지은 백광홍
관서별곡은 관서 지방을 여행하고 지은 가사 문학이다. 이 관서별곡이 훗날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의 모체가 되었고 차후 가사문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기봉 관서별곡 가비'에 있는 비음기(碑陰記)의 내용을 보자.
"기봉 백광홍은 조선가사문학을 선도한 문인이시다.
선생은 수원인(水原人)으로 중종 17년(1522) 장흥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빼어나 뜻이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행동 규범에 빈틈이 없었다. 일찍이 일재 이항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고, 영천 신잠,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의 제현과 사귀어 덕업을 쌓았다. 명종 4년(1549)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동 7년(1552)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고, 이듬해 호당에 뽑혔다. 명종 10년(1555) 봄에 평안도 평사가 되어 서도(西道)에 가 관방(關防)을 살피고 그곳의 여항 세태와 자연풍물을 구경하면서 가사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명종 11년(1556) 가을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성하여 부안 생관에서 별세하니 향년 35세였다. 기봉의 부음을 듣고 그의 대성을 바라던 일재 선생은 대유(大裕-기봉의 자)의 문재와 학덕은 그의 동료 중에서 보기가 드물었는데 이를 크게 펴지 못한 것이 아깝다하고 크게 슬퍼하였다.
사후 순조 8년(1808)에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다."
기봉은 어려서 일재 이항(一齎 李恒)에게 글을 배우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율곡 이이(栗谷 李珥) 영천 신잠(靈川 申潛)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송강 정철(松江 鄭澈)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고죽 최경창 (高竹 崔慶昌) 등과 교류하면서 문재와 학덕이 크게 완성되었다.
1549년(명종4) 28세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고 1552(명종7) 31세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호남과 영남의 문신으로서 성균관에서 시재(試才) 겨루기를 하게 되자 기봉이 시부동지(時賦冬至)로 으뜸을 차지하여 선시(選時) 10권을 특사 받았고, 다음해에 호당(湖當)에 선발 되었다.
1555년(명종10) 34세 때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서도(西道)의 국경방비 지역에서 민폐를 보살피며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1556년 (명종11) 나이 35세에 병환이 생겨 평안도 평사 자리를 내어놓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 전북 부안 사위의 집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선생은 한시인(漢詩人)으로서 보다 관서별곡에 의해 가사문학가로 더 유명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함께 교류관계를 가졌던 고죽(孤竹) 최경창은 선생의 관서별곡을 접하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錦繡煙花依舊色 수놓은 비단같은 아지랑이 속의 꽃은 옛모습 그대로이고
綾羅芳草至今春 능라같이 부드럽고 꽃다운 풀은 오늘도 봄이로구나
仙郞去後無消息 신선같은 그대 떠난 뒤 소식이 없으니
一曲關西淚滿巾 한가락의 관서별곡에 눈물이 수건에 가득하여라
이렇듯 당시 관서별곡에 대한 칭찬이 잦았으나 일찍이 세상을 떠남으로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다. 선생의 관서별곡은 정송강의 관동별곡보다 25년을 앞서 불려지고 두 선생간에 교류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관동별곡을 짓는데 구성과 표현수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요절한 자신의 삶을 상징하는듯 삶의 무상함을 빗대어 읊은 '숙소소래(宿小蘇來)'라는 시이다.
"덩굴풀 옛길 덮고 고라니 사슴 뜰에 와 노네
중들은 말없이 수행중인데
빈창만 바닷 달 휘영청 비치어서 추어라."
이처럼 문명을 끝까지 일구자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기봉과는 달리 그의 동생인 옥봉은 해남에 살며 500수가 넘는 시들을 남기며 조선조 8문장으로까지 문명을 날리게 된다.
# 삼당시인, 8문장으로 문명을 날린 백광훈
조선 16세기 김안로, 허황 등이 중종의 문정왕후를 폐하려다 실패하여 폐사되거나 귀양을 가게 된 어지러운 시절, 문인들은 이런 사회 풍조에 맞춰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걸머지고 팔도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어지러운 세상과 나라의 앞일을 문장으로 토해내는 유랑문학을 태동시켰으니, 그 대표적인 시인 중 한사람이 옥봉 백광훈이다.
그의 맏형인 광홍(光弘)은 관서별곡의 저자로 유명하고 둘째 광안(光顔), 사촌 광성(光城)이 모두 특출해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 사촌 광성(光城)이라 불렀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의 풍조를 쓰려고 노력하여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파(三唐派) 시인으로 불린다. 팔문장(八文章: (조선 중기에 널리 문명文名을 날리던 8대 문장가를 8문장가라 한다.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을 비롯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중호重湖 윤탁연尹卓然,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고담孤潭 이순인李純仁,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간이簡易 최립崔:, 청천菁川 하응림河應臨 등 8인을 일컫는다)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영화체(永和體)에도 빼어났다.
그리고 그의 천부적 재질은 아들 백진남과 손자 백상빈에까지 이어져 삼대 시인 가문으로도 더욱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들 삼대를 삼세삼절(三世三絶)이라 부르며 그 뛰어난 재주와 인격을 높이 샀다.
옥봉은 이렇듯 문장가 가문의 가정환경이 준 문학적 영향아래서 시적 천분을 꾸준히 연마하여 성당(盛唐)의 경지에 이른 고아하고 유려한 시풍을 확립했다.
# 출생과 행적
백옥봉은 1537년(중종32) 정유년 장흥군 안량면 기산리에서 진사로 참봉을 지낸 백세인의 세아들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조상들의 높은 학문적 업적과 가풍을 이어받아 평생을 방랑시인으로 유랑하여 저항의식을 화선지에 토해냈다.
자는 창경(瘡卿), 호는 옥봉(玉峰)이고 본관은 해미(수원)이다. 원래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수원에서 살았는데 조부인 백회(白檜)가 연산군때 장흥으로 귀양와 살게됐다.
옥봉은 본래 장흥 기산리에서 출생하였으나 그의 나이 다섯살때 해남 옥천의 대산리로 옮겨와 옥당서당의 정응서의 문하생으로 입문, 학문을 닦고 시상을 넓혀갔다.
광훈의 호 옥봉은 옥천의 진산이며 그가 어린시절에 수학하던 초당이 있었던 옥산(玉山)에서 유래한다. 광훈의 아들 진남이 옥천면 송산리에 세거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광훈의 아들 진남이 아버지의 학덕을 추모하여 건립한 옥봉강당과 광훈의 사당이 있고 유물관에는 옥봉집의 판목등 광훈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광훈이 태어날 무렵의 조정은 잦은 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벼슬에 환멸을 느끼고 산골로 들어가거나 혹은 향리로 되돌아가 시와 자연을 벗하며 은밀한 가운데 나름대로 지조를 지키던 때였다.
그는 나이 13세때 학업을 닦기 위해 상경 대제학과 영의정등을 지낸 당대의 석학 박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해 과거에 응시 13세의 어린 나이로 초시에 급제하여 세인의 놀라움과 촉망을 한몸에 받았다.
그후 양응남, 노수신 등의 경학과 문장의 대가 밑에서 꾸준히 학업을 쌓아 10대에 벌써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는 문장가요 시인,명필의 위치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28세 때인 1546년(명종19)에 사마시에 응시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의 혼탁 부패한 사회의 불의와 야합해야만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현실에 혐오를 느껴 문과에 응시하는 것을 단념했다.
이는 그가 굴레 속에서의 규율적 생활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탓도 있었다. 성품이 원래 호방하고 활달한 그는 세상의 유행이나 풍속에 쉽사리 휩슬리지 않았고 그래서 속박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이러한 성격때문에 그는 말년에 잠깐 참봉에 나갔을뿐 평생을 포의(布衣)로 만족했다.
고향에 내려온 그는 하동정씨 정강왕의 딸로 아내를 맞아들인 후 옥천면 대산리에서 1km 가량 떨어진 송산리로 이사한다.
그의 글과 글씨는 명나라 사신들이 놀랄 정도로 뛰어난 명필의 천재 시인 이었다. 1572년(선조5) 그의 나이 33세때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게되었다. 이때 이들의 접반 안내를 책임맡은 노수신은 명나라 사신을 상대로 시문을 응수할 인물을 찾던중 백의(白衣)의 광훈을 추천하여 명나라 사신을 상대로 시문의 실력을 발휘하게 했다.
광훈의 탁월한 시문과 글씨를 대한 사신들은 조선에도 이런 특출한 시인이 있는가 하고 경탄해 마지 않았으며 그를 백로선생(白老先生)이라 불러 존경을 보냈다 한다.
그는 시뿐만이 아니라 글씨도 잘쓰는 명필로 알려졌으며 특히 영화체(永和體)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독보적 경지를 이룩하여 해동필가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벼슬에는 뜻이 없는 그였지만 친지들의 강권에 못이겨 그의 나이 41세때 예빈시참봉등을 거쳐 소격소(昭格署)참봉으로 재직중 발병하여 한창 시세계가 무르익어 가던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582년(선조15) 5월 14일이다.
광훈은 1590년 강진 서봉서원에 이후백,최경창등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옥천면 송산리에 있는 옥봉사당에서는 매년 봄,가을 추모제가 베풀어지고 있다.
# 전해오는 일화
그가 당시 함께 어울렸던 임제(林悌 : 1549∼1587)와 곧잘 말 한 필로 긴 방랑길에 오르곤 했는데, 그들은 서로 마부를 하루씩 교대하기로 했다. 그들이 관서팔경을 유람하고 개성에 도착하니 해가 서산 마루에 걸렸고 노자도 떨어져 할 수 없이 어느 부잣집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어 이날 마부였던 광훈이 주인에게 하룻밤 쉬어갈 것을 청하자 주인이 쾌히 승락하였다. 그러나 광훈은 하인들과 하룻밤을 보내야만 했다. 저녁을 먹은 후 주인으로부터 건너오라는 전갈이 왔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분부를 기다리는 광훈에게 임제는 '하인치고 글 잘하는 이가 너말고 또 없으란 법도 없겠지만 어르신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며 '운자는 서울 경(京)이다'라고 분부했다.
이에 광훈은 약속이라도 한 듯 붓을 들어 거침없이 시를 써내려갔다. '서울가는 나그네가 개성을 지나는데 / 만원대에는 인적도 없고 계곡물은 성벽을 돌아 흘러가네 / 슬프다 오백년의 역사여 / 두견새 우는 소리에 청산이 빨려 들어가네'. 주인은 경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라도 백옥봉과 임백호가 글 잘한다고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글 잘하는 하인은 생전 처음 보았소' 하니 '주인 어르신 저희들이 바로 백옥봉이고 임백호입니다'하며 웃었다고 한다.
#백광훈의 시세계
광훈의 시는 성당(盛唐)의 시인 이백,두보등이 경지에 도달하였다 하여 삼당파 시인이라 불렀다.
이 삼당파는 광훈과 시풍을 같이하는 최경창, 이달을 포함하여 일파를 이룬다. 이 세사람중 광훈의 시는 여아(麗雅)했으며 특히 절귀시(絶句詩)를 잘 지었고 경창의 시는 청숙(淸淑)했고 이달의 시는 고절(孤絶)한 특징이 있었다.
광훈은 젊은 시절에 이율곡,송익필,최립,이산해,양사언,이순인,하응림등의 쟁쟁한 문사들과 친히 사귀어 무이동에 모여 교류하였으며 세상에서는 이들을 팔문장이라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뛰어난 문장가인 정철, 서익등과도 친숙한 사이였으며 그들과 삼청동에서 늘 같이 놀았으므로 세상사람들은 이들을 이십팔숙(二十八宿)에 비유 선망과 존경을 보냈다.
옥봉은 송강 정철과 막역한 사이였다. 정철은 「송강집」에서 '옥봉의 문장은 빼어남과 맑음을 기개로 하고 있고 청명한 시가와 오묘한 필법은 으뜸가는 재주다. 동이술로 글을 논할때 언제나 칼날처럼 서늘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현재 옥봉의 유품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돼 옥천면 송산리 옥봉 유물관에 소장돼 있다.
저서에는 옥봉집 3권이 있고 글씨는 대동서법(大東舒法),고금법첩(古今法帖)등에 수록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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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에 살아나는 백광훈의 시
-김문태(멍석말기)/ 세번째 이야기 : 언어의 감옥/[한시 맛보기] 2003-12-29
(언어의 감옥: 立象盡意論- 싱거운 편지-백광훈과 양사언)
함경도 안변 땅에 벼슬 살러 가 있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서울에 있던 백광훈白光勳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반가운 마음에 겉봉을 뜯어보니,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三千里外, 心親一片雲間明月
라는, 딱 열 두 자 한 줄의 사연이다. 이만 사연 전하자고 천리 길에 편지를 띄웠더란 말인가. 그러나 음미할수록 새록새록 정감이 넘나는 뭉클한 사연이다. 한 조각 구름 속에 밝은 달이라 했으니, 달은 달이로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달이다. `心親`이라 하여 그밖에 다른 것에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였다. `月印天江`이랬거니, 달은 나 있는 안변이나 너 있는 한양이나 가뭇없이 비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널 보듯이 달을 보고, 달 보듯이 너를 생각는다는 사연이다. 그나마도 그 모습은 보일듯 구름 사이로 숨기 일쑤이니 이 아니 안타까운가. 단지 열 두자의 편지가 심금을 울린다.
노산의 시조에 "진달래 피었다는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지 못하고"라고 한 것이 있지만, 야릇할 손 봉래의 편지여!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빠꼼이 내민 달과 친하다니 말이다. 그리움을, 보고 싶단 말을 이리 말하는 마음. 삼천리 밖에서 보낸 편지 치고는 싱거워서 뭉클한 사연이다.
서울 봄날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드니
글 속엔 다만 `심친心親`이란 말 뿐이라.
그리는 맘, 구름 달을 오히려 부렀구나
삼천리 밖 사람에게 나누어 비칠테니.
一紙書來漢口春 書中有語只心親
相思却羨雲間月 分照三千里外人
앞 편지를 받고 쓴 백광훈의 시이다. 편지를 손에 들고 그 역시 그리움에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백광훈의 시를 다시 한 수 더 감상해 보기로 하자.
뜬 인생 백년 간을 괴로워 하며
웃는 얼굴로 식구를 달래었지.
금릉성 아래 와서 올려다 보니
흰 구름 아직도 구봉산에 걸렸구나.
浮生自苦百年間 說與妻兒各好顔
却到金陵城下望 白雲猶在九峯山
제목은 〈별가別家〉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부생浮生`을 탄식하며 `자고自苦`한다 했으니, 떠나는 사연이야 짐작할 만하다. 실제로 그는 젊은 날 실의와 곤궁 속에 처가에서 더부살이 하는 처지였었다. 이후로도 실의와 좌절은 평생을 두고 따라 다녔지만, 한미한 집안의 선비로 기약 없는 청운의 길을 찾아, 처자식을 처가에 맡겨 두고 길 떠나는 참담함이 1.2구 안에 눈물처럼 배여 있다. 좋은 낯빛으로 떠난다는 말이 그래서 더 안스럽다.
집을 떠나 재를 건너고 뫼를 넘어, 금릉성 아래 께까지 와서 참고 참다 집 쪽을 돌아보았다. 산 마루가 가로 놓여 있으니 보일 리 없다. 그러나 구봉산엔 흰 구름이 그대로 걸려 있구나. 집을 나설 때 암담하게 막아서던 구봉산. 그 때 그 묏부리 위에 걸려 있던 그 구름이 여태도 그곳에 머물러 있다. 1구의 `부생`과 4구의 `백운`이 여기서 다시 만난다. 정처 없이 떠돌아도 좋은 날은 오지 않는데, 저 산 마루 위 구름은 `공자망空自忙`의 부생浮生을 비웃기나 하는 듯이, 제가 무슨 바위 인양 꿈쩍 않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 웃는 얼굴로 헤어졌지만 가슴을 에이는 씁쓸한 느낌, 금릉성을 내려와 구봉산 돌아 보니, 올라 올 적 흰 구름이 그대로 걸려 있네. 아직도 가족 생각에 애잔한 내 마음처럼. 백광훈은 다정다감한 시인이다. 이런 그이고 보니, 봉래의 앞서의 편지가 있음직도 했겠다. 그의 시를 가만이 읽고 있노라면, 필자는 웬지 그 잔잔한 슬픔에 감염되어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게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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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서 찾는 지혜] 지리산과 금강산 /한국경제-2003년 03월 03일
地異雙溪勝/金剛萬覆奇/名山身未到/每賦送僧詩
지이쌍계승/금강만복기/명산신미도/매부송승시
지리산 쌍계사 풍광이 빼어나고 금강산 만폭동 경관이 기이하다는데
이름난 산 들을 나는 가보지도 못하고 매양 스님 천송하는 시나 읊조리고 있다네
백광훈이 읊은 '증사준상인 贈思峻上人'이다.
지리산과 금강산은 우리나라 남쪽과 북쪽에 있는 명산으로 우리의 선대들은 그 곳을 마음대로 오가며 그 기상과 아름다움을 시로 읊고 노래하고 그림으로도 그렸다.
그러다가 어찌되어 국토가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면서 길이 막혔고 반세기 넘는 세월을 우리는 그냉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하늘과 바다 그리고 육로도 뚫렸으니 이산가족이나 버스 타고 가는 관광
객들만 말고 제발로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병한 < 서울대 명예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