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인(조선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오는 6월이면 장흥 출신 가사문학의 효시인 기봉 백광홍이 2004년 '6월의 문화인물'이 된다. 문화관광부는 지난 해 12월, 각계에서 추천한 37명 역사인물 중에서 분야 별로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자문위원회의 검증 절차를 거쳐 우리나라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고 국민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이른바 '이달의 문화인물'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로 공인받고 있는 백광홍을 비롯한 12명을 최종 선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인물 선정에서 기봉 백광홍 선생은 6월의 문화인물이 됐다. 이에 본자에서는 장흥의 가사문화과 백광홍 특집을 3회로 나누어 다뤄본다…편집부 주◆
글-백수인(조선대학교 교수.문학박사)
1.기봉 백광홍과 장흥의 가사문학
1) '호남 가단'과 장흥의 가사문학
호남은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생산물이 풍부한 지리적 환경과 빼어난 자연 환경
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어서 예술이 잘 발달된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호남 지방은 문학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 원류를 찾아 올라가면 호남은 옛날 마한의 집단 가무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에서 분화 파생된 백제의 '정읍사'를 모체로 속요, 단가, 경기체가, 가사, 판소리 등 다양한 형식의 문학이 생성 발전해 옴에 따라 우리 나라를 시가 문학의 요람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의 가사문학에 이르면 호남 지방은 더욱 활기 찬 면모를 보여 준다. 가사 작품의 효
시인 정극인으로부터 시작하여 30여명의 가사 작가가 호남 출신이다. 또한 유배, 전쟁 출정, 관리 부임 등으로 이 지방에서 지은 작품과 작가도 많다. 유배 가사의 효시로 알려진 조위(1454-1503)의 '만분가', 이서(1482-?)의 '낙지가', 정철(1536-1593)의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이 호남 지방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작품들이다. 이상의 작가와 작품까지를 아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호남의 가사는 40여 명의 작가에 70여 편의 작품에 이른다. 가히 가사 문학의 보고라 할 만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호남 지방 가사 문학의 중심에 장흥 지방이 놓여 있다는 점이
다. 장흥 출신 가사 작가와 그 작품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뛰어났다는 점은 특이한 현상이다. 호남 지방의 가사 작가와 그 작품을 출신 지역 별로 따져 보면 <표1>과 같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금까지 알려진 호남 출신 가사 작가는 총 31명이고, 그 작품 수는
56편이다. 이를 다시 출신 시군으로 나누어 보면 <표2>와 같다. 장흥 출신 가사 작가는 기
봉 백광홍을 비롯한 7명으로 호남 지방 가사 작가 전체의 22.58%를, 이들의 가사 작품 수는 총 15편으로 호남 지방 출신 작가에 의해 창작된 전체 작품의 26.79%를 차지하고 있다. 이로써 작가 수에서나 작품 수에 있어서 장흥은 호남 가사 문학의 중심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장흥 지역 출신 가사 작가와 작품을 한데 묶어 살피는 것은 의의가 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표1> 호남 출신 가사 작가와 작품 일람
1.정극인(1401-1481)/상춘곡/전북 태인
2.송 순(1493-1582)/면앙정가/전남 담양
3.백광홍(1522-1556)/관서별곡/전남 장흥
4.정 훈(1563-1640)/용추유영가, 수남방옹가, 탄궁가, 우활가, 성주중흥가/전북 남원
5.윤현변(1616-1684)/귀산곡, 태평곡, 청학동가/전남 나주
6.박사형(1635-1706)/남초가/전남 보성
7.윤이후(1636-1699)/일민가/전남 해남
8.박순우(1686-1759)/금강별곡/전남 영암
9.위세직(1655-1721)/금당별곡/전남 장흥
10.황 전(1704-1772)/피역가/전북 고창
11.노명선(1707-1775)/천풍가/전남 장흥
12.정 방(1707-1789)/효자가/전남 창평
13.위백규(1727-1798)/자회가, 권학가, 합강정선유가/전남 장흥
14.강응환(1735-1795)
<표2> 호남 지방 가사 작품과 작가의 출신 지역별 분포
전북 태인-작가 3명(9.68%)-작품 6편(10.71%)
전남 담양(창평 포함)-작가 5명(16.13%)-작품 11편(19.64%)
전남 장흥-작가 7명(22.58%)-작품 15편(26.79%)
(작가미상 작품 2편 제외)
전북 남원-작가 1명(3.26%)-작품 5편(8.93%)
전남 나주-작가 1명(3.26%)-작품 3편(5.36%)
전남 보성-작가 1명(3.26%)-작품 1편(1.79%)
전남 해남-작가 1명(3.26%)-작품 1편(1.79%)
전남 영암-작가 2명(6.45%)-작품 3편(5.36%)
전북 고창-작가 2명(6.45%)-작품 2편(3.57%)
전북 부안-작가 2명(6.45%)-작품 2편(3.57%)
전남 장성-작가 2명(6.45%)-작품 3편(5.36%)
제주-작가 1명(3.26%)-작품 1편(1.79%)
전남 화순-작가 2명(6.45%)-작품 2편(3.57%)
전북 익산-작가 1명(3.26%)-작품 1편(1.79%)
▲가사 작품 계 31명 56편
2. 장흥의 가사 작가와 작품
(1) 기봉 백광홍(岐峯 白光弘)과 '관서별곡(關西別曲)'
종래의 국문학사에 조선조에 '관서별곡'이라는 가사 작품이 있다고 하여 그 제목을 언급하
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멸하여 그 내용이 현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며, 작자에
대해서도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기봉의 막내아우로 최경창,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문명을 떨쳤다. 문집으로 '옥봉집(玉峯集)'이 전한다. 기봉은 둘째 아우 풍금風岑 白光顔.막내아우 옥봉, 종제 동계 백광성과 더불어 경사에 통하고 시와 글씨에 능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한 가문에 4문장이 났다고 칭송하였다.)으로 오인한 전적이 많았다.(조윤제<'한국문학사' 탐구당, 1971, p.175. pp.199-200>를 비롯하여 김사엽 김사엽의 '이조 시대의 가요연구', 김동욱의 '국문학개설' 등의 서적과 김사엽 각종 백과사전 등의 사전류에도 지은이, 제작 시기 등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심지어 두 편의 별개의 가사인 '기성별곡(箕城別曲'과 '향산별곡(香山別曲)'을 합쳐서 '관서별곡'이라고 제하였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었다.(李周洪, "실전으로 전해 오는 고전가사 관서별곡에 관하여", '국어국문학' 제13호 국어국문학회, 1955.)
그러던 중 이상보(李相寶) 박사가 1961년에 수원 백씨 기봉공파 종가(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460번지)에서 기봉 백광홍의 시문집인 '기봉집'(岐峯集: 5권 2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선생이 서거한 후에 유고 중 상당량이 임진 병자 양란으로 유실되었지만, 1851년,철종 2년, 후손 진항鎭恒에 의해 정리되었고 1866년 8대손 후진厚鎭이 증보할 때에 '관서별곡'을 첨기하였다. 이것을 1899년-고종 광무 3년, 기해-에 12대손 희인羲寅이 상하 2책으로 장흥 안양
주산에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희귀하여 연구자들이 쉽게 볼 수 없으므로 1987년 변
시연邊時淵이 중간 서를 붙이고 13대손 남신南伸이 이 발문을 붙인 데다 이상보, 정익섭
두 교수의 연구 논문을 부록으로 하여 500부 한정판으로 영인하여 '전국시가비건립동호비'
에서 반포하였다.)을 발굴하여 거기에 게재되어 있는 '관서별곡'을 분석 평가, 소개한 '관서 별곡 연구'('국어국문학' 26호, 국어국문학회, 1963)를 발표함에 따라 '관서별곡'의 진면목이 알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관서별곡과 작자인 기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기봉의 인
품과 문학이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가사뿐만 아니라 기봉 문학에 대한 전
반적인 연구로는 장희구,'기봉 백광홍의 시문학 연구', 조선대 대학원 박사 논문, 1996.이 있다.)
'기봉집'이 발견되어 소개되면서 거기에 실려 있는 홍직필(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
酒 經筵官) 서(書)의 서문, 백사근白師謹(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찬(撰)의 서문, 홍직필 찬의 묘갈명, 백후진(白厚鎭) 백채인(白采寅) 백희인(白羲寅)의 발문(跋文) 등을 근거 삼아 기봉의 생애와 인품에 대하여 단편적으로나마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광홍의 호는 기봉(岐峯). 홍직필의 서에 의하면 "관산의 기양에 살았던 까닭에 기봉이라
하였다(居冠山之岐陽故號岐峯云")고 한다. 그의 태생지는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이며, 자(字)는 대유(大裕)로 1552년(중종 17년) 장흥군 안양면 기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당시 詩山(태인)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호남의 거유인 일재 이항(一齋 李恒.1499-1576)에게 가서 학문을 닦았다.
기봉은 영천 신잠(靈川 申潛),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하서 김린후(河西 金麟厚), 율곡
이이(栗谷 李珥),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등 당대의 쟁쟁한 학자 문인들과 도의지계(道義之契)를 맺어 덕업을 쌓았다. 천품이 빼어나 뜻이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행동 규범에 빈틈이 없었다. 홍직필이 쓴 '묘갈명'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부(富)는 가히 구할 것이 아니요 귀(貴)는 가히 도모할 것이 아니다. 구하지 아니하고 도모하지 아니함은 하늘의 이치가 되기 때문이다. 가난해도 족히 근심할 바 아니요, 천하다고 족히 슬퍼할 바 아니다. 담연히 빈방에 있어도 맑은 바람 밝은 달이다. 임금과 상제가 계시거늘 내 누구를 믿을 것인가"("嘗作座右銘曰富不可求貴不可謀不求不謀順天所爲貧不足憂賤不足悲澹然虛室風光月齊吾誰恃乎有皇上帝")라는 좌우명을 지었다고 한다.
28세 때인 1549년(명종 4년, 을유)에 진사 생원을 뽑던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였고, 3년 후인 1552년(명종 7년, 임자) 11월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정자(正字)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에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영호남의 문신들이 모여 재주를 겨루게 되었다. 이 때 기봉은 부(賦) '동지(冬至)'를 지어 장원으로 뽑혀 임금으로부터 '선시(選詩' 10권(이 책은 현재 안양면 기산리 460번지 수원 백씨 기봉공파 종가에 보존되어 있다.)을 특사 받았다.
다음 해인 1553년에는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리고 1555년(명종 10년, 을묘) 봄에 평안도
평사(評事)에 임명되어 서도관방에 부임하였다. 그 곳에서의 삶과 정취, 자연 풍광을 시문으로 음영하던 중에 가사 '관서별곡'을 지으니 당시에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이수광, '지봉유설'."白光弘曾任平安評事而卒其所製關西別曲至今傳唱").
특히 '관서별곡'은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로서 송강 정철이 25년 뒤에 지은 '관동별곡'에 직
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두 작품을 분석하여 비교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
하여 극명하게 증명되었다. 즉 이상보, 정익섭(전남대)교수의 연구는 '관서별곡'이 모티프, 구성 형식, 표현 기법에 있어서 '관동별곡'의 모체가 되었음을 적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서별곡'은 '금당별곡(金塘別曲)'을 지은 위세직(魏世稷), '인일가(人日歌)'와 '초당곡(草堂曲)' 등을 지은 이상계(李商啓), '자회가(自悔歌)'와 '권학가(勸學歌)'와 '합강정선유가'를 지은 위백규(魏伯珪), '청풍가(天風歌)'를 지은 노명선(盧明善), '장한가(長恨歌)'를 지은 이중전(李中銓), '덕강구곡가(德剛九曲歌)', '덕천심원가(德泉尋源歌)' 지은 문계태(文桂泰) 등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어 소위 '장흥가단'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정익섭 교수는 "이 가사가 나오게 되자 정철의 관동별곡'이 나오게 되고, 같은 유형의 조우
인의 '속관동별곡', 위세직의 '금당별곡' 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백광홍의 관서별곡은 조선조의 모든 기행가사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아 마
땅하리라 생각한다."(丁益燮, '改稿 湖南歌壇硏究' 민문고, 1989, 103면.) 그는 또 "호남시가사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길이 찬양 받아 마땅한 존재"(정익섭, "관서별곡과 조선조 가사문학", '기봉집' 중간본, p.39.)라고 그 문학사적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또한 고경식 교수는 신재 조우인의 가사 작품 전반에 '관서별곡'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고증하고 있다.(高敬植, '관서별곡''과 '출관사', '국어국문학' 제36집, 51-57면에서 ' 一齋集 卷二, 題出關詞後, 出寒曲後'의 "昔白斯文光弘 爲關西幕評 以俚辭 製長歌一篇 世所謂關西別曲者是也 云云"과 "白詞則鳴於關西 鄭詞則播於關東"을 들어 당시 기봉의 관서별곡과 송강의 관동별곡이 인구에 회자되었음을 알 수 있고, 신재 조우인은 양대 가객의 영향을 입었다고 하여 정익섭의 간접 영향설과 달리 그의 모든 가사 작품이 기봉의 관서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입었음을 밝히고 있다.)
가사는 주로 한문으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던 당시에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가락으로 표현
한 예술 양식의 하나이다. 따라서 '관서별곡'은 언어 의식에 가치를 둔 현대의 국문학 연구
의 경향에 힘입어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되어 온 셈이다. 그러나 기봉의 문학 세계는 '기봉
집'에 전하는 많은 한시문(賦 9편, 五言絶句 9편, 五言古詩 3편, 七言絶句 52편, 七言四韻 17편, 七言古詩 11편, 詩山雜詠 28편 등) 들을 이해하여야만 비로소 드러나리라고 생각된다.
기봉은 특히 칠언에 능하였고, 사상은 유가에 바탕을 두었다. 유가적인 군신의 도를 읊은 것으로는 '천행건(天行健)' '영명덕지여(令名德之輿)' '덕법어민지구(德法御民之具)' '부귀재천(富貴在天)' '효제(孝悌) 등 제목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기봉은 '관서별곡'을 지은 이듬해인 1556년(명종11년, 병진)에 병환으로 벼슬을 내놓고 돌아오게 된다. 그해 음력 8월 27일 부안의 처가에서 생을 마치니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선생의 스승인 일재(一齋)는 부음을 듣고 "문재와 학덕이 드물게 뛰어났는데 이를 크게 펴지 못한 것이 아깝다하고 크게 슬퍼하였다."(이항, '一齋遺集' 券之三 門人錄, "先生哭之慟曰才德鮮傷惜乎不能大施").
1808년(순조8년, 무진)에 기양사(岐陽祠: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동계마을에 있다. 8문장이라 함은 기봉 선생을 비롯하여 기양사에 배향되어 있는 남계 김윤(1506-1571), 서곡 임분
(1501-1556), 죽곡 임(林)회(1508-1573), 동계 백광성(1527-1595), 풍잠 백광안(1527-1567) 옥봉 백광훈(1537-1582), 지천 김공희(1540-1604) 등을 말한다.)에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